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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piece/사보에이] 야식 좀 드시겠어요?
야식 좀 드시겠어요?
Sabo x Ace Slash fan-fiction (Based on the comic "Onepiece")
written by Cielo in May, 2011
"그래서 오늘도 안된다고?"
"진짜 미안하다. 이번 학점 엄청 중요한거 너도 알잖냐."
"야, 그래도 오늘 같이 밥먹기로-"
'뚝-뚝-'하고 수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소리에 에이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게 무슨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근 일주일째 녀석을 못봤다. 어릴적엔 서로 떨어져 죽고 못산다 매일 붙어다녀서 숱한 사람들에게 "에이스와 사보는 나중에 커서 결혼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작 정말로 사귀게 되니깐 녀석과 도통 가까이 있을 수 없게 되버렸다는 것은 뭔가 이 세상이 자신에게 음모를 꾸미는 거 아닌가 하고 에이스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먼나라의 공산국가 소행 아니야?
"그럼 직접 찾아가보면 되잖아."
"야, 말이 쉽지. 괜히 갔다가 얻어맞으면 양반이게?"
맨날 사귄다 사귄다 소리만 들었는데, 이제서야 사귀네? 하고 자신들의 첫키스를 소위 직관해버린 루피는 그 뒤로 이상하리 만큼 둘의 연애사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에이스가 집을 비우기라도 하면 우와 둘이 자고와? 어디? 호텔? 사보집? 이라고 한밤중에 전화를 하지 않나, 데이트라도 하는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즐거운 데이트 되세용^0^이라고 상큼한 이모티콘을 붙이면서 문자를 보내오는 동생의 머리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비범한 행동력에 에이스는 혀를 차기 시작했다. 너 임마, 대체 이러는 저의가 뭐야? 남 연애 신경끄시고 너야말로 연애좀 해봐라 연애좀! 이라고 걱정어린 한소리를 매번 해보지만 루피는 헤헤 거리며 하지만 난 그런거 관심 없단 말야-하고 일언으로 단정짓고 했다. 그런 주제에 왜 남의 연애에 배놔라 감놔라야.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런 몹쓸일까지 들통나버린 대상이 어찌보면 루피인 것이 다행인 것 같았다. 적어도 녀석은 둘의 연애에대해 혐오적인 감정이나 피하는 것은 없으니깐. 아니 오히려 더 좋은거지, 둘의 연애를 축하한다고 파티까지 벌여준 아주 고마운 동생이다. 덕분에 쉬쉬할필요 없이 연애에 대해서 답답하거나 조언을 얻고 싶을때마다 에이스는 항상 루피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그리고 루피는 설령 현문우답을 할지어도 에이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들어주었다.
"그러네. 사보면 확실히 때리고 집밖으로 던져버릴거야. 공부할때 신경이 무진장 예민해지잖아? 근데 보고싶다며. 문자라도 보내봤어?"
"열통째 무시하고 있어."
"그럼 좀 참아야겠네. 엄청 집중하고 있구먼"
아니 그래도 이렇게 까지 문자 답장도 뜸하고 통화도 안한적은 없었단 말야. 이제 에이스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나? 저번에 배고프다고 기달리지 않고 먼저 먹기 시작한게 잘못이였나? 아님 저번 밤일가지고 툴툴거린게 영 불만이였나? "끄으응.."하고 신음소리를 내니 루피가 혀를 찬다. 젠장! 살면서 루피에게 동정표를 사게 될줄이야. 넌 얼렁 연애나 해! 하고 에이스는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대체 매번 왜저런데, 나미이상으로 예민해졌네. 그러다 문득 30분뒤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는 걸 알게된 루피는 에이스보다 빠른 스피드로 방으로 들어가 허겁지겁 옷을 맞춰입기 시작했다.
"안돼.. 결국 와버렸다."
멍청한 짓이었고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된다고 에이스의 머릿속에서 그를 다그치고 있었다. 야임마 야밤중에 학교 기숙사를 와봤자 어떻게 할건데?
"시끄러! 난 그냥 야식사온거라고 야식! 먹을거 얼마나 좋아 먹을거! 시험기간에 안먹고 밤새 어떻게 버틸건데 응?"
"저 사람 이상해. 잘생긴 것 같은데 자기야."
"야, 저게 뭐 잘생겼냐. 잘봐라 눈처진거. 내가 더 잘났지. 저런 미친놈은 피하는게 상책이야"
아 열받는다. 척 보기에도 참깨가 쏟아지다 못해 기름으로 짜여저서 줄줄 흐르는 커플 두명이 서로를 꼭 안은채 자신을 피하는 걸 느낀 에이스는 아직도 뜨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떡볶이와 순대가 든 검은 봉다리를 들고 사보가 살고있는 기숙사동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시간을 보니 11시 20분. 30분째 이러고 아무행동도 하지 못하고 굳게 닫혀있는 사보의 창문이 그저 얄미웠다. 그러고보니 차 시간이 지나버렸네, 사우나가야하나? 그러다 문득 에이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금은 모조리 야식을 사는데 써버렸다는걸 기억하게 되었다. 버스카드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지? 이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자 갑자기 땀이 줄줄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나 진짜 노숙해? 그러자 주머니에서 지이잉 하고 진동이 울렸다. 루피다.
[어디야. 집에오니 아무도 없다?]
"야 루피 나 클났다."
[왜, 사보가 헤어지재?]
"야 임마 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어찌되었든 나 지금 그녀석 기숙사 앞인데 멍하니 있다가 막차 놓쳤어."
[안됐네. 사우나 가야겠다]
"야식사는데 돈 다 써버렸어!"
[잘됐네. 먹을거 있잖아. 그럼 됐지 뭐.]
아 안돼. 이녀석이랑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게 불가능 했어. 됐다 속편한 놈아, 얼렁 잠이나 자! 하고 전화를 뚝하니 꺼버리고 한숨을 쉬던 에이스는 진짜 먹을걸로 밤을 버텨야 하나 하고 사보가 있는 방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런데 왠일인지 창문이 열려있다.
"너 여기 왜왔어?"
"사..사보!"
창밖으로 사보가 얼굴을 빼곰 내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에 버럭 소리를 지른 것에 에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나보다. 아직 저녁엔 쌀쌀한데 반팔 반바지에 맨발의 슬리퍼를 하고 한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있는 연인을 쳐다본 사보는 진심으로 다시 창문을 닫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으로 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아저씨도 아니고 창피해. 하지만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사보오~!"하고 외치는 에이스의 우렁찬 목소리에 뭐야 뭐야 하면서 하나 둘 창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자신과 에이스를 번갈아 쳐다보는 시선은 이미 돌릴수가 없었다.
"시험기간에 왜이리 시끄러워. 얘기나눌거면 나가서 해!"
아오 저 화상. 하고 사보는 무섭게 에이스를 한번 노려보고는 창문을 드르륵 닫아버렸다. 오메 큰일이다 사보 화났나보다 하고 에이스는 초조함에 손가락을 앙하니 물어버렸다. 설마 이제 얼굴도 못보는거 아냐? 하지만 다행히도 잠시후 기숙사 문을 열고 나오는 사보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화는 났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쓴 채이긴 했다.
"사..사보 미안."
"검은 봉다린 뭐냐?"
"아.. 야식 먹으라고 사온건데."
"어떤 바보가 야식을 사러 한시간동안 버스타고 오냐?"
죄송합니다. 근데 우리 근 열흘넘게 못봤잖아요. 문자도 안받고 답답해서요. 라고 에이스는 차마 입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입술만 우물우물 거렸다. 풀죽어서 우물거리는 에이스를 보자 화내도 내 사랑이요, 시험공부 힘들다고 야식까지 사온 모습이 기특하고 너무 윽박을 질렀나 하는 생각에 사보는 멋쩍은듯 뒷머리를 긁적 거렸다.
"너 안춥냐?"
"...어 좀 춥다."
둔한게 형제가 쌍으로 닮았어요. 사보는 혀를 끌끌 차며 손에 들고있던 얇은 점퍼를 건넸다. 사보야 사랑한다. 울먹울먹한 눈망울로 사보를 쳐다보자 다큰놈이 징그러우니깐 그 눈빛 치우라고 으르렁 거린다. 다시 풀죽어서 어깨를 축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보는 커다란 리트리버한마리를 키우는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너 차 끊겼지?"
"응"
"돈도 없지?"
"와 너 진짜 똑똑하다."
그야 그런 옷차림으로 책가방만한 검은 봉다리를 들고 왔으면 돈도 없는게 먹을거 사다가 다 털린거라고 쉽게 아는거 아니냐 하고는 사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야식은 기특하다 짜식. 옆에 공원가서 사온거 먹고 근처 사우나라도 가자."
"어? 나와도 돼?"
"주말이라 괜찮아."
만세! 님은 저 산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별입니다. 기쁨에 찬 에이스가 등 뒤에서 사보를 꽉하니 안았다. 너무 꽉 안는 바람에 에이스의 팔에서 허공위로 회전하던 거대한 검은 봉지가 사보의 가슴을 묵직하고 질퍽하게 강타했다. 아 너 진짜 맞고 싶어서 이러냐. 죄송합니다 성님. 그 후로는 말 없이 터벅터벅. 조금 걸으니 정자가 있는 작은 공원이 나왔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정자에 막걸리를 거듭푸고 있는 젊은이들로 인해 발도 대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한밤중인데다가 시험기간이라 사람도 없고 휑한게 편히 앉아 야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뭘 이렇게 싸왔냐 니들 위장을 타인에게 적용시키지마"
"그래도 밤엔 먹어야 힘이 나지!"
"반만 덜 샀어도 네 돈으로 사우나 갔거든?"
정자 중앙에 잔칫상이 차려졌다. 무슨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검은 비닐봉지에서는 꾸역꾸역 먹을것들이 쉼세 없이 잘도 나온다. 떡볶이, 순대, 튀김, 과자, 음료수, 빵 아마 돈이 넉넉했으면 피자에 치킨도 있었으리라.
"어쨋든 먹자. 나 배고프다"
"너 먹으려고 산거냐?"
그런 것 같습니다. 에이스는 신난 표정으로 이미 떡볶이 비닐을 부욱 찢으면서 입에는 꼬치를 앙하고 물고 있었다. 그러고는 적당히 식은 떡복기를 한번에 두개씩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순대 봉지 과자봉지 빵봉지를 차례대로 뜯기 시작했다. 먹을것에 관한 무서운 실행력이다. 그렇게 한동안 숨도 쉬지 않고 집어먹다가 퍼뜩 뭔가 떠올랐는지 아부아부거리더니 다시 꼼꼼히 씹어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삼킨 뒤 사보를 쳐다보았다.
"맞다. 너 시험공부 안해도 괜찮아?"
"그런건 오기전에 생각해라!"
"아니.. 생각 했는데 말이야.."
에이스가 시선을 옆으로 흘리면서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말을 해 임마. 평소에 남이 말을 흐리거나 아무일도 없었다-라고 내뱉으면 목을 졸라서라도 끝말을 듣고야 마는 성격이 저렇게 우물쭈물 거리는 것은 뭔가 일이 있는게 확실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말을 하라고! 하니깐 입을 삐죽 내밀면서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아니.. 그래도 역시 나한테 뭐 화난거 아닌가 해서... 걱정두 되고.."
사보는 멍하니 에이스를 쳐다보았다. 내가 왜 너한테 화가 나? 아니.. 문자도 잘 안하고 전화도 안받고.. 말했잖아 시험공부하느라 바쁘다고. 그래도 이렇게 심하게 연락이 안된적도 없었고.. 밥약속도 멋대로 취소하고.. 다시 우물쭈물. 그런 모습을 보자니 왠지 한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사보역시 같이 우물쭈물 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거 니잘못이 아니라 내잘못 이잖냐.. 거.. 대체 뭐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한거야?"
"글쌔.. 저번 밤에 너 별로 였다고 한거?"
아아.. 그거, 생각해보니 진짜 괘씸하네? 사보가 에이스를 쳐다보고 콱하니 인상을 쓰자 에이스가 움찔거렸다. 거봐 역시 화났네! 그러다 느닷없이 양반다리를 한채로 팔을 이용해서 앞으로 다가오는 사보를 보고는 에이스는 알수없는 공포를 느꼈다. 야, 야 아 왜 갑자기 계속 다가오는거야? 떡볶이! 거기 떡볶이 국물... 아 왜 계속 오는데요? 그러다보니 에이스 역시 양반다리를 한 채로 팔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주변에 누군가 있었다면 괴상한 앉은뱅이들의 추격전에 어이를 상실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스윽 스윽' 옷스치는 소리를 내며 두명의 앉은뱅이의 추격전은 에이스가 정자 끝에 도달해 울타리에 뒷통수를 꽁하고 찌을때까지 계속되었다.
"아 왜 계속 다가오는...거세요.."
"내가 그리 시원치 않았다 이거지? 본격 야외에서.avi찍어볼까?"
"아뇨 싫은데요"
사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설레설레 얼굴에 두려움을 담아 고개를 젓는 에이스의 가슴팍을 한손으로 내리쳤다. 아 씨! 뒷통수 계속 박잖아 아프다고! 혹났어 책임 지라고! 하고 소리를 지르던 에이스는 순간 얼레? 하고 정면을 쳐다보았다. 완벽하게 눕혀진 상태에서 덥쳐오는 사보의 얼굴이 가깝다.
"야.. 너 진짜로 할려고!"
음흉한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진다. 말도안돼 엄마 얘가 시험본다고 공부만 하다가 욕정이 쌓이다 못해 머리가 훼까닥 돌았나봐요.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다급한 나머지 사보의 팔을 옷자락을 꽉하니 잡으면서 안돼 밖에선 진짜 안돼 미친놈아 라고 중얼거리면서 눈을 꽉 감은 에이스는 입술에 잠깐 닿다가 훽하니 떨어지는 보드라운 감촉을 느꼈다. 그러더니 손에 잡혀있던 옷자락도 훽.
"엥?"
찡그린 눈을 떠보니 약오르지 하는 표정으로 사보가 선채로 에이스를 내려보고 있었다.
"뭘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너 진짜 속이 새까만게 음흉하다."
"아니 니가 갑자기 다가와서 퍽하고 눕히는데 내가 뭐.. 내가 뭐가 음흉한데에!"
아직도 얼떨떨한지 상반신을 반쯤일으키다 멍하니 있던 에이스는 얼굴이 빨개진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이놈아. 미안하다고 아 진짜 한번만 소리 더 지르면 너 밖으로 던진다? 야밤에 인적없는 공원에서 둘은 투닥투닥. 그러다가 반정도 남은 떡볶이를 밟고 함께 미끄러지면서 남은 야식들을 뒤집어 엎어 더이상 먹지 못했다는 후일담까지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다음날 떡볶이 국물에 심하게 얼룩진 옷을 입고 새벽에 너털너털 집으로 돌아온 에이스는 왠일인지 과하게 일찍 일어난 루피에게 딱 걸려버렸다. 대체 뭐야 그거? 루피가 얼굴을 찌푸리고 묻자 에이스는 괜히 얼굴이 벌게진채 대답했다. 별거아냐 야식먹다 흘렸어.
글
[TF2/스나스파] 겨울에 (for. 및)
- 날아가는 그 순간이 조금 아쉬울 때가 있어.
겨울에
Sniper x Spy
For.MIT
그 해 첫눈이 내렸다. 스나이퍼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의 커튼을 젖혔다. 유리창에는 하얀 서리가 도톰히 내려앉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감싸 안았는지 아침인데도 밖은 밤 마냥 어두웠다. 미국의 겨울은 스나이퍼가 매년마다 익숙하지 못한 것 들 중 하나였다. 스나이퍼는 거실의 등을 켜고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가 커피포트에 전원을 켰다. 커피포트 안에는 아직도 에스프레소가 반 정도 차있었다. 스나이퍼는 의자를 끌어와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이 참 많이도 쌓였다. 라디오를 켜니 캐롤이 한창 흘러져 나왔다. 한 곡이 끝나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커피포트의 전원이 꺼졌다. 스나이퍼는 커다란 머그잔에 한 가득 커피를 부었다. 그러고도 커피포트에는 아직도 커피가 남아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전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남지 않았는데…… 스나이퍼는 싱크대에 남은 커피를 모조리 부어버렸다. 커피 잔이 놓은 테이블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스나이퍼는 창가에서 눈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뒤로 하고, 스나이퍼는 베란다 문을 열고 거실 슬리퍼를 신은 채로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새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노란빛을 띄는 작은 새였는데 스나이퍼는 이 새가 무슨 종인지는 몰랐다. 다만 예전에 스파이가 기르던 카나리아와 무척이나 닮았다고는 생각했다. 스파이는 그 새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새를 무척이나 아꼈는데, 어느 날인가 새장청소를 한다고 잠시 문을 열어놓은 사이에 날아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실망하진 않았다고 스파이 자신은 애써 무덤덤하게 있었지만 스나이퍼는 그 작은 미소 사이로 떨리던 입술을 아직도 선명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스파이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새들은 말이야. 날아가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긴 해도, 날아가는 그 순간이 아쉬울 때가 있어.
스나이퍼는 조심이 작은 육체를 손으로 들어 올려 감싸주었다. 눈 마냥 차가웠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천 행주 한 장으로 새의 시체를 덮어주고는 작은 삽 한 자루를 챙겨 뒷마당으로 나가 담장 밑을 파내어 새를 묻어주고 잠시 묵념을 했다. 추운 날씨에 잘도 구름을 뚫고 높은 곳으로 날아갔구나, 작은 새야. 스나이퍼는 한동안 가만히 새의 무덤을 바라보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세안을 하고 옷을 두텁게 갖춰 입은 스나이퍼는 앞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걷는 거리는 쌓인 눈에 사람들이 발자국을 새기고, 또 그 위에 눈이 덮이고를 반복한 모습이 뚜렷했다. 스나이퍼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놓고 다른 사람들처럼 눈 위를 걷기 시작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스나이퍼는 고개를 들고 입김을 불어보았다. 뽀얀 입김이 잿빛 하늘위로 올라가다 부옇게 퍼져서 올라갔다. 올해 날씨가 그렇게나 춥다더군. 스파이가 어딘가에서 스나이퍼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스나이퍼는 고개를 외투에 파묻으며 계속 걸었다.
글쎄 스파이. 그렇지 않아. 올해가 더 춥거든.
스나이퍼는 커다란 작은 봉분 앞에 섰다. 오늘 그가 새의 무덤을 만들어 준 것보다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더 커다란 묘였다. 스나이퍼는 앙상하게 메마른 나뭇가지를 묘 옆에 놓아두었다. 길가에 핀 꽃도, 열려있던 꽃집도 폭설로 인해 오는 길에 단 한 번도 보질 못한 스나이퍼가 유일하게 선물할 수 있던 것이었다.
언젠가 눈이 녹으면 여기에 꽃이 필거야. 알잖아 스파이.
스나이퍼는 새의 무덤을 쳐다본 것과 같이 빤한 시선으로 스파이의 묘를 바라보았다. 무덤은 조용했다. 조용하다 못해 살아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스파이도, 잔디도, 가지마저 죽어있었다. 묘는 한적했고, 스나이퍼의 발자국만이 이 하얗고 고요한 도시의 유일한 산 증인이었다. 스나이퍼는 어쩐지 혼자만 살아남아 서글퍼졌다. 스나이퍼는 주머니에서 스파이의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생전에 남긴 스파이의 남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그 외에 스파이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까지도. 스나이퍼는 문득 스파이가 예전에 한 말을 기억해냈다. ‘어차피 잠시 머물다 가는 자유로운 생명에 이름표를 새기나?’ 왜 새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냐 물어본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스나이퍼는 혹시 스파이도 새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자유로운 생명이라 스파이는 이름이 없었나 보다. 그럼 우리는, 나는 무얼까 스파이? 스나이퍼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무덤 앞에 담배개비를 세워주었다. 응? 스파이. 스나이퍼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끝끝내 스파이는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올게. 스나이퍼는 등을 돌려 걸음을 걷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이 고요했다. 눈이 점점 굵어진다. 마치 살아있는 것들의 흔적을 지우듯이.
스나이퍼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파이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스나이퍼는 자신의 밴을 팔았다. 예전처럼 이리저리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마 스파이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스나이퍼는 이상하게도 스파이가 죽은 곳에서 몸이 묶였다. 자유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차 안은 후덥지근했다. 후덥지근해서 창문마다 허옇게 김이 서렸다. 스나이퍼는 창가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가 한 손가락으로 창문에 선을 그었다. 한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지만 스나이퍼는 개의치 않고 창가에 손가락으로 꾸물꾸물 무언가를 열심히 그렸다. 새 한 마리였다. 스나이퍼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새를 그렸다. 그리고 그 옆에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름 하나를 적었다. ‘스파이’ 그는 차창에서 손가락을 떼고 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는 잠시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창가에 다시 서려오는 김에 흐려지기 시작했다. 스나이퍼는 창가에 입김을 불었다. 새가 사라졌다. 스파이란 이름도. 스나이퍼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날아가는 그 순간이 조금 아쉬울 때가 있어 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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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U/스팁토니] The Lost Mans
The Lost Mans
"Steven/Tony" slash fan-fiction (based on MCU)
[for the Steven/Tony anthology]
written by Cielo in Jan.2013
내 이름은 두 가지다.
첫 번째로는 내 어머니가 나에게 지어주신 ‘토니’라는 이름과,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하워드 스타크의 아들 토니 스타크’다. 앞서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보통 후자로 나를 많이 불렀는데 사실 그건 나를 뜻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그 치들에게 보이는 나는 딱 내 아비의 껍질을 쓴 작은 하워드 스타크였으니 그 사람들이 내 진짜 이름에 대해서는 한 톨의 관심도 없는 건 당연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였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사라진 때 말이다. 그것은 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아버지조차도 언젠가부터 나를 당신의 작은 후계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가물가물하게 회상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항상 아버지를 따라 크고 작은 온갖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를 소개시키고는 더 이상 소개시킬 사람이 없는 순간이 오면 나를 뒤에 있는 경호원에게 떠밀어 놓고는 딱 한마디를 하셨다. “격식을 차려라 토니.” 나는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높은 의자에 앉혀져 파티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스타크 부부의 키 작은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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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멀미라.”
“좋아 오늘은 날 엿 먹일 수 있겠군 미스 캡시클.”
“파티에서.”
“그래 파티에서.”
나는 테이블에 있던 싱글몰트 한 병을 집었다. 토니, 그만- 하고 입을 열었던 스티브는 내가 술로 가글을 하는 모습을 보곤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고지식한 영감은 일 하나가 잘못되면 세계대전이라도 일어나는 듯 행세하곤 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나는 술을 병체로 연거푸 들이키며 곁눈질로 스티브의 표정을 살폈다. 심각한 눈 안에 작은 아이 하나가 들어있었다. 바 의자에 앉아서 수많은 사람들을 쳐다보다 발도 닿지 않는 의자에서 간신히 내려오는 어린 아이가.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나는 정말 괜찮아 스티브. 그러나 스티브는 내 말을 부정했다.
“모두가 널 걱정하고 있어.”
“그들이 걱정하는 건 내가 아니야. 아무도 어린 소년이 사라진 줄 모르니깐.”
“토니, 자네 취했군.”
나는 검지를 올려 그의 입으로 갖다 대었다. 스티브는 시선을 내 검지로 옮기더니 자신의 손으로 내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따듯했다. 나는 취하지 않았어, 스티브. 나는 취하지 않았어. 나는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했다. 분명 해야 할 다른 말이 있을 텐데? 스티브는 다시 토하게 둘 순 없다며 내 손에서 술병을 뺏어갔다. 술병이 없으니 나는 무력해졌다. 비틀비틀 걸어가 간신히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스티브는 싱크대에 남은 술을 모조리 붓고 있었다. 나는 저 남자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챙기려 드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그가 부정하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집 잃은 사람, 자신을 잃은 사람,
외로운 사람.
그는 나 말고는 의지할 사람이 전혀 없던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세상에 떨어진 사람. 그는 퍽이나 나와 닮아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등은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였다. 스티브 내가 누구지? 스티브는 등을 홱 돌려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이었다. 내가 다시 물어보자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토니. 토니 스타크.”
“토니는 죽었어.”
“입은 살아 있는데?”
나는 그의 말에 웃었다. 그래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스티브는 나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괜찮아? 나는 쓰게 웃어 보였다. 아니 괜찮지 않아, 키스해 줘. 그는 조금 망설이는듯 하다가 주춤주춤 허리를 숙여 짧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도 뜨거웠다. 그의 체온이, 나의 체온이 이렇게나 남아있는데 왜 우리는 얼어 죽어있는가? 나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문득 옛날얘기가 생각이 났다. 그에게는 옛날 얘기가 아니겠지만……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갔던 그 레스토랑 말이야, 뒤쪽에 작은 문으로 나가서 조금만 걸어가면 호수가 나오는 거 알고 있나?”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레스토랑은 말이야, 내가 열 살 때 아버지, 그러니깐 하워드 스타크를 따라갔던 곳이야. 그리고 나는 할 일이 없어 조용히 앞에 있는 바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가스터빈 엔진의 구동원리를 생각했지. 그러다가도 지겨워 졌을 때 말이야 창문가로 반짝이는 호수가 보이더라고. 그 때는 12월 말이었고, 호수는 얼어있었지. 혼자 남은 열 살 소년이 언 호수를 보고 무엇을 생각 했을 것 같아?”
“호수로 나갔군.”
“맞아. 날이 매우 추운 날이었어. 전날도, 전전날도 눈이 내렸으니깐. 호수는 꽁꽁 얼어있었어. 아이가 보기에는 말이야. 첫 발을 디디고 두 번째 발을 디디고도 호수는 단단했어. 그러니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나는 손가락을 쫙 핀 한 손을 들어올렸다. 스티브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올라갔다. 나는 그대로 손을 수직으로 하강시켰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빠졌어? 나는 빙그레 웃었다. 맞아 빠졌어.
“얼마 가지 못했는데 서 있는 자리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났어. 빨리 한 발을 뒤로 하면 되었을 일인데 그거 알아? 얼음이 깨지는 거 말이야, 굉장히 빠르더군. 엎드린 채 자빠졌는데 칼에 베인 것 같았어. 옷을 그렇게 두껍게 입었는데 등까지 차오르는 물이 차다 못해 뜨겁더라고. 상체는 간신히 얼음판에 매달리고 하체는 바동거리면서 ‘살려주세요’를 외쳤는데-“
“누군가 자넬 찾아왔겠지. 그 경호원 말이야.”
“아니, 아무도 안 찾아왔어. 나 혼자 올라왔지 작은 손을 이렇게 쫙 펴서 기대고 있던 얼음판위로 기어 올라왔어. 정말 무서웠어. 올라오는데 1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하루가 지난 기분이었지. 다리가 마비가 된 듯 후들후들 떨렸어. 단단한 얼음판을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갔지. 그리고 덜덜 떨다가 몇 번이나 주저앉은 뒤에야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갔지.”
그럴 리가. 스티브는 굉장히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었지?”
“말했잖아. 토니를 죽었다고. 어린 토니를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던 거야. 내가 쫄딱 젖은 채 레스토랑으로 걸어 들어가니 그제야 사람들이 나를 보고 경악을 했지. 담요를 덮어주고 라디에이터로 데려가서 몸을 녹이고 있으니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내 잘난 아버지께서 오시더군.”
나는 순간 울컥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삼키었다. 그리고 나한테 말했어. 창피한 줄 알라고. 스티브는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라는 커다란 벽이 생겼다. 하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스티브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쓴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날로 어린 토니는 죽은 거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하워드의 아들 토니 스타크가 남았지. 나는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슬펐다.
“울상 짓지 마 영감님. 난 단지 1분만 빠져있었다고, 자네는 몇 년이지? 70년?”
스티브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술이 깨야 할 필요가 있다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나는 그가 어루만진 내 머리를 만지며 비로소 우리의 열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얼음 위를 위태위태 걷고 있는 사람들. 호수에 빠졌던 그 날의 한기였다. 너무 차가워 오히려 뜨거웠던 그 한기. 결국 우리는 열기라곤 없는 송장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그는 동정심을 담아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젠 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곁에 있잖아.”
“아니, 그럴 리가.”
얼음을 꺼내던 스티브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자네도 나처럼 이미 죽은 사람이야. 죽은 자들 말고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누가 있지?”
스티브는 말이 없었다. 묵묵하게 트레이에서 얼음을 꺼내는 소리가 난다. ‘짤랑’ 얼음끼리 맞부딪치며 잔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저 소리가 우리의 관계를 나타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떨어지며 깨어지는 얼음들. 진저에일을 따르는 스티브의 어깨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나는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떨지를 생각하며 차디찬 등에게 소리 없이 물었다. 위태위태하게 빙판길을 걷는 심정이 어때요 캡틴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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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BBC Sherlock/셜존] The Good Night
The goodnight
"Johnlock" fan-fiction (Based on BBC Sherlock)
written by Cielo in Nov. 2010
최근 셜록은 3일간 잠을 자지 않았다. 그의 책상과 탁자주변에는 각종 잠 깨는 약과 피로회복제의 빈 병들이 무정부주의의 혼란함 같이 역하게 뒤섞여 굴러다니고 있었다. 도저히 안되겠군. 오늘은 자네를 신경과에 데려가야겠어. 존이 소파에서 무릎을 감싸 안고선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는 셜록의 어깨를 잡았다. 오 존 나는, 나는 아주 제정신이야 잠만 안 잔다면 말이지. 셜록은 눈을 치켜 올리며 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 밑은 검게 기미가 패여 있었다. 셜록 대체 무슨 일이 생긴거야? 네가 사건 때문에 밤을 새가면서 그것에 매달리는 거라면; 물론 그 역시 좋다는 게 아닐세, 적어도 네가 왜 이러는지 이해라도 하겠지 하지만 너를 봐 너는 지금 사건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 너는 지금 아예 사건을 맡기를 꺼려하고 있잖아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존이 셜록에게 추궁하듯 다그쳤다. 하지만 셜록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병원에 가지 않아 나는 아직 제정신이니깐 차라리 가볍게 입이라도 맞춰주지 그래? 존의 시선이 천장의 허공을 맴돌면서 그의 어깨가 무겁게 들어 올려졌다. 자신의 이상한 플렛메이트이자 최악의 연인인 이 남자의 괴상한 행동에 존은 포기와 안쓰러움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존이 보기엔 셜록은 현재 굉장히 좋지 않았다. 보름 전부터 잠을 제대로 못 이루기 시작한 존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더욱 비적 마르고 더욱 음침해져 갔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고 두 시간 내내 일어나지도 말을 하지도 않은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존은 그의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이나마 짐작은 하고 있었다. 티비를 켜면 석 달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악몽에 의해 잠을 거부한다고 한다. 그 꿈은 사람들에 따라 개개인의 괴상함을 띈다. 하지만 최근 학자들이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 모든 꿈은 그들을 끝없는 적막과 고독으로 몰아넣어 그들의 자아를 파괴하고 미치게 만든다고 하였다. 이미 런던에만 공식적으로 악몽으로 인해 잠을 들 수 없다고 호소한 환자가 500여명이 넘었고. 이러한 악몽으로 인해 미쳐가던 30명 정도는 그들이 그렇게나 거부한 악몽으로 빨려 들어가 영영 깨어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한 방송사에서는 언젠가부터 잠이 들면 사지가 꺾여 전혀 움직일 수 없이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의 주변에 수백 개의 시계가 끊임없이 초침소리를 내느라 잠을 들고 싶지 않다는 불면증 환자 한 명을 장기적으로 취재한 다큐를 만들었다. 실로 이 다큐는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를 좀먹는 이 알 수 없는 밤의 괴물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무서운지를 증명해주었다. 취재를 시작할 때부터 그 남자는 손목시계의 초침소리마저; 여러분도 알겠지만 손목시계의 초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극적으로 꺼려했고 경기를 일으켰다. 다큐의 중반부부터 그는 더 이상 어떠한 대화도 하지 못했다. 그는 3일만에 꿈에서 깨어났으며 말을 상실한 듯 했다. 초점 없는 멍한 눈에 벌어진 입에서는 끊임없이 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윽고 취재를 시작한지 26일째 그는 더 이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존 역시 이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아직까지 그는 무사했지만 그의 연인은 확실하게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꿈을 꾸는지 존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전 세계가 알 수 없는 공포의 실험체가 되었으며, 셜록은 그 실험적인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려고 하고 있었다.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과 각국의 인사들과 모든 사람들은 이 알 수 없는 악몽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뉴스의 절반은 이 악몽에 대한 내용들 이었으며; 이 악몽에 대한 가장 최근의 기사는 "WHO는 현재 알 수 없는 악몽에 의해 코마상태에 이른 환자들의 안구운동과 호르몬의 분비가 일반인들보다 3배정도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였다, 악몽을 꾸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씩 증가하고 있었다. 존은 소파에서 웅크리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 셜록을 바라보며 체념한 듯이 물었다. 그럼 밥이라도 먹겠어? 아니 괜찮네. 그럼 우유라도 좀 마시지 따뜻하게 데워올 테니. 커피 다섯 스푼만 넣어주게 그리고 서랍에 들어있는 니코틴패치도 가져와주고. 존은 알겠어, 라고 대답한 뒤 부엌에 들어섰다. 일주일전 셜록이 자신의 잠을 이겨내기 위해 각종 화학실험에 이용된 재료와 비커들이 얕게 먼지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존이 신경질적으로 치우지 않으면 버려버리겠다고 윽박을 지를 때마다 셜록은 성을 내며 존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 장식품들을 도무지 치울 수가 없었다. 그는 포트에 우유를 데우고 한 컵에는 커피를 한가 득씩 퍼 올려 다섯 스푼을 꾹꾹 채워 넣은 뒤 스푼으로 휘저었다. 하긴 이런 알 수 없는 전염병을 신경과에 간다고 치료할 수나 있겠어. 그 어떤 의사도 학자도 이 병의 치료와 예방법은 고사하고 원인조차 규명해 내지 못했다. 바지주머니에서 미약한 진동을 느낀다. 존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올린 뒤에 전화를 받았다. 그의 누나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의 동생에 대한 온갖 걱정이 가득했다. 난 괜찮아 해리 그러는 너야말로 어떤 거야? 괜찮은 거지? 그래 다행이다. 어 그래 해리 조심하고 혹여라도.. 꿈을 꾸게 된다면 꼭 연락해. 그래 나도 사랑해. 통화종료를 누르면서 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세상에, 어느 가족이 꿈꾸는 것 하나에 이리 긴장을 하겠어? 적어도 세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안부전화만큼이나 바보 같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우스꽝스러움이 무시무시한 현실이 되어버린 사회에 존은 문득 자신이 혼자 남겨진 사람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연인은...... 맞아 셜록! 존은 황급히 두 개의 머그잔을 들고 셜록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여기 있어. 고마워. 셜록이 가느다란 손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갈색의 액체가 담긴 머그잔을 받았다. 존은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라떼를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는 셜록을 바라보다가 그의 소파 옆에 털썩 앉았다. 셜록은 조금 놀란 듯 존을 바라보았다. 그래 탐정나리 우리 탐정나리를 괴롭히는 그 꿈이 뭔 지라도 들어봐야지. 존이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셜록을 쳐다보았다. 셜록이 조금은 놀란 듯이 존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요즘 유행하는 거잖아. 통원치료를 거부한다면야 바로 옆에 의사가 있으니깐 집에서 상담을 받는 방법이 있지 않나? 넉살이 10분도 안돼서 굉장히 좋아졌군 그래도 키스는 안 해주는군. 칭찬으로 알아듣지 그리고 어차피 모두가 겪게 된다면야 미리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선행학습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셜록이 뽀얀 연기가 옅게 올라오는 라떼와 존을 번갈하가면서 곰곰이 쳐다보다가 그래 좋아. 라고 말을 했다.
내 꿈은 하얀색이야. 하얀색? 존이 물었다. 그래 하얀색. 머그잔을 든 반대 손으로 셜록은 존의 머그잔에 든 우유를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교묘하게 가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없어 그냥 하얀색이야 오직 나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하얀색이야 길도 하늘도 벽도 살인도 사건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 먼지한줌도 바람한줄기도 남아있지 않아. 너답지 않은 시적 표현이군. 존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며 말하자 셜록이 인상을 썼다. 시적인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지 나만 덩그러니 서있는데 아니 내가 서있는 건지 누워있는 건지 알 수도 없군 그곳이 대체 어떤 것인지 모르니깐 그냥 온통 새하얀 곳에 무중력상태로 내가 떠있는 기분이야 거기서는 내 목소리도 통하지 않아 음파도 존재하지 않으니깐 얼마의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지 나는 그냥 내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 존재를 증명하지 하지만 요즘은 점점 버티기가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야. 존은 재빨리 자신의 손으로 우유를 감췄다. 괜히 물어봤어 끔찍하군. 존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다만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군. 이라고 대답을 하고 셜록을 쳐다보았다. 존 두려워하는군. 셜록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한 가지 따뜻한 말을 내뱉어보자면 존 자네는 절대 이 꿈을 꾸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셜록이 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라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존은 그의 힘없는 미소를 보고는 셜록의 귀에는 닿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두렵지 아주 두려워 나는 아직 그것을 겪어보지 못했으니깐 사람들은 항상 죽음 그 다음이 무엇이 있는지 몰라 두려워하는 거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종착역이라면 차라리 죽음이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셜록 너는 내 두려움만 봤어. 난 두렵지만 그것보다 이제 너를 그런 곳에 보내야 하는 슬픔이 더 큰 거야. 존도 셜록에서 시선을 거두고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셜록은 126시간하고 48분만에 잠을 들지 않으려는 그의 이성이 잠을 원하는 그의 신체적 비명의 아성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듯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존이 장을 봐왔을 때 그는 이미 잠이 들어있었다. 존은 그의 곤히 잠든 모습을 보면서 저 평화로운 표정 너머의 그의 뇌 속에서는 그가 말한 하얀 세상이 그를 어떻게 가두어 놓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침투사고로 인해 괴로워했다. 셜록 셜록. 어깨를 흔들어 그를 깨워보려 했지만 그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어떤 세상이 너를 가두는 거야. 존은 그의 머리를 안쓰러운 듯 쓰담아 주고는 그를 안아 침대에 조심이 누였다. 뉴스에서는 이미 전 세계의 10%이상이 이 죽음보다도 괴로운 악몽을 경험하기 시작했으며 이 악몽의 후환을 두려워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자살하고 있다는 보도가 독감처럼 퍼져나가 있었다. 오늘도 존이 쇼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이 그 길에 있는 건물 옥상에 투신을 했다. 그가 지나갈 때 한 사람은 아직 응급차가 도착하지 않아서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목이 꺾인 게 즉사가 분명했다. 웅덩이를 이루기 시작하는 핏물 사이에 누여진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된 듯한 표정으로. 존은 역한 기운을 간신히 참고 사체의 주변에 몰려들어 공포감에 젖어있고 그 중 울음을 터트린 몇 명의 사람들을 지나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셜록의 표정도 겉보기엔 평화로웠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죽음이 더 괴로운 걸까 아니면 고립돼버리지만 영원히 존재함을 느낄 수 있는 이 꿈이 더 괴로운 걸까. 존은 그날 밤새도록 잠들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깨어나지 않는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은 나흘간 깨어나지 않았다. 셜록이 눈을 막 떴을 때 그는 존을 못 알아보는 듯 했다. 하지만 존이 이런저런 경험담을 얘기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셜록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셜록홈즈란 사람과 그의 주변인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기 시작했다. 글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어. 사흘일수도 있고 일초일수도 있고 백 년이 넘었을지도 모르지 그곳은 어떤 시간이라도 될 수 있어 단 일초라 할지라도 사람이 미치기엔 충분하거든. 셜록은 다시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힘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괴로움과 슬픔이 있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미소였다. 존, 하나 알아둬야 할 게 하나 있어 처음에 고립되어 버린다는 이 괴로움은 상상이상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떠한 한계점을 넘어버리면 내 자신을 잊기 시작하지 그럼 그걸로 끝이야 더 이상 괴로움이란 감정은 사라지게 되지 자신을 잃어버리는 거야 그냥 아무것도 없게 돼버려. 그것이 셜록이 자신의 친구에게 건넨 마지막 충고였다. 그 둘은 그날 점심과 저녁을 먹고 셜록은 더 이상 악몽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잘 자라는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셜록은 다시 잠이 들었고 그는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존은 그 동안 아직 악몽을 꾸지 않았다. 티비에서는 “나는 어떤 작은방에 갇혀있고 문 너머로 계속 누군가가 문을 두들겨요 그리고 문 너머의 사람은 절대 노크를 멈추지 않죠 저는 죽을 만큼 두려워하다가 미쳐버려요 저는 다시는 잠들고 싶지 않아요.” 라는 유서를 남기고 템즈강에 몸을 던진 열여섯 살의 소녀에 대한 기사와, 모든 시간이 멈추고 자신 혼자만 움직이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지 못한 한 남자가 꿈에서 깨고 움직이는 사람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애인을 포함한 열네 명의 시민들에게 칼부림을 해서 5명의 시민을 살해한 남자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이 남자는 사건을 당일 잠이 들고는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세상은 점점 미쳐가기 시작했다. 신흥종교가 기하학적으로 증가하였고, 자살자는 지난 석 달간 공식적으로 영국에서만 2만 여명이 넘었다. 거리에는 마약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각종 범죄가 만연했다. 정부는 그러한 행위를 막으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아직까진 잠잠한 베이커가의 풍경을 바라보는 존은 어렴풋이 들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셜록이 깨어나는가, 깨어나지 않는가 하는 걱정에 하루하루를 소비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눈을 뜬 셜록을 보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존은 셜록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하지만 어떠한 존의 행동에도 셜록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존은 예전에 다큐에서 본 그 남자와 셜록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번에 잠들면 셜록은 영영 일어나지 못할 거다. 존은 하루 종일 셜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곳에서의 하루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혼자라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셜록? 그곳은 말이 필요 없겠지 이젠 방송국에서는 하루의 반이 예전 프로그램을 재방송해주고 있어 왜냐면 온갖 유명인사들과 리포터들도 악몽을 꾸기 시작해서 미치거나 죽거나 너처럼 영영 잠을 들려고 하기 때문이야 그래도 아직까지 뉴스는 하고 있어 하루 삼십 분정도지만 최근에는 너 같은 사람들이 전 세계의 절반을 넘었다고 하더라고 하루에 거리에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범죄가 얼마나 있는지 네가 알게 되면 너는 기뻐서 한 달은 잠을 이루지 못할걸? 하지만 이젠 그게 일상이고 이젠 법을 수호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알다시피 가장 범죄해결 운운하는 나리께서도 이러고 있지 않나 어제 너희 형님이 왔다 갔어. 마이크로프트도 꿈을 꾸기 시작했대. 3일전부터 나에게 말하길 그는 아마 자기만큼 살만한 꿈을 꾸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 꿈속에서 그는 온갖 달콤한 음식들과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들이 있는 시대에 사는 유일한 사람이라던데? 과연 사실일진 모르겠지만. 존은 여기까지 말하고 즐거운 듯이 낄낄거렸다. 몇 분이고 웃던 존의 웃음소리는 광기에 서린 듯이 비명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는 셜록을 붙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있잖아 셜록 내 생각은 말이야 이게 나에게 있어 악몽이 아닐까 싶어. 나도 언제가 돼야 너희들 중의 한 명이 되는 거지? 나는 언제까지 이 지옥 같은 참상을 바라만 봐야 하지? 이걸 지켜보는 게 나한테 악몽이 아닐까? 눈을 떴을 때 잠든 너를 바라보는 거 사이렌소리를 듣는 거 사람이 지면에 떨어지는 소리와 비명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지? 셜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향해 따듯하거나 안쓰러운 눈빛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이미 꿈속에 있는 듯 했다. 확실한 것은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는 것이다.
셜록 이제 졸린 가봐. 초승달이 하늘을 어둡게 데워가는 초저녁이었다. 셜록의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존은 퉁퉁 부은 눈으로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그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감겨주었다. 잘자. 평화롭게 잠든 셜록의 얼굴을 몇 십 분이고 쳐다본 존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음을 느꼈다. 그는 꿈속에서 행복할까? 아니 꿈속에서도 그는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그럼 뭐가 남을까 그는 이제 어디 있을까 나한테는 아직 옆에서 숨쉬면서 곤히 잠들어있는데 말이지. 이제는 그의 투명한 눈을 볼 수는 없겠지 존은 씁쓸한 표정으로 셜록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잘 자게 잘 자, 셜록. 나도 이젠 잠자리에 들어야겠어. 존은 셜록의 옆에 나란히 누워 그를 꼬옥 껴안았다. 적어도 내가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악몽이기를 일어났을 때 셜록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존 사건이 일어났네 완벽해! 라고 외치는 그 모습을 한번만 다시 볼 수 있기를. 존은 눈을 감았다. 셜록의 체온은 따듯하다. 이제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냥 따뜻한 온기만 남아있다.
모든 게 악몽이어도 이것만은 꿈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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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Sherlock/셜존] 런던의 하늘처럼(Like sky of a London) (0) | 2015.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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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BBC Sherlock/셜존] 런던의 하늘처럼(Like sky of a London)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존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의 몸을 감싸 안는 익숙지 않은 온기와, 욱신거리는 하복부, 게다가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
'대체 얼마나 퍼 마신거지?'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보자고 생각을 한 존은 무겁게 올려지는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자신의 팔에 달라붙던 무언가가 밑으로 '툭'하니 떨어진 것 같지만 지금으로썬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는 팔을 움직이기에 한층 수월했으니깐.
그러니깐 전날에 존은 사라와 함께였었다. 그녀의 침대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존은 사라에게 "당신만 괜찮다면 이곳에서 함께 지내보지 않을래요? 음..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죠. 만약 당신이 이곳에 오고 싶다면.. 이곳에는 당신이 누워서 밤을 보낼 수 있는 침대가 하나 있으니까요."라는 말을 들었다. 존은 아직은 이르다며 정중히 거절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베이커가의 하숙집에서 셜록홈즈라는 이상한 동거인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상황이 썩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의 동거인의 태도에 약간 질려있었다. 최근 따라, 아니 정확히는 '그 사건'이후에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간단한 안부에도 짜증을 내기 일쑤였으며, 어떤 복잡한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현재 어떤 사건을 맡고 있다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자신이 귀찮은 존재인양 행동하고 있는 셜록의 태도에 그는 질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이 참에 그 징그러운 녀석과 이별을 고할 수도 있겠지.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인데 절대 나쁠 게 아니니깐.'
여자의 집에서 얹혀산다는 약간의 부끄러움만 감안한다면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직업도 있겠다, 같이 벌어가면서 생활을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짜증이 난다 해도 우선은)자신의 동거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인사만 고하고 나올 수도 없는 일이라 복잡한 감정을 안고서는 초저녁에 사라와 잠깐의 이별을 고하고 그의 하숙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때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호칭을 말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존은 자신이 아프간에 있었을 때 같은 참호에서 생활을 했던 제임스란 청년을 만났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제임스란 사내는 젊고 쾌활한 성격을 - 그러니깐 전쟁터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 가진 신병이었다. 존은 그를 이 넓은 런던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해준 것에 퍽 기뻐하면서도 쾌활함이 사라진 초췌한 제임스의 안색을 걱정하며 그와 근처 펍으로 향했다. 그와 술잔을 나누면서 존은 제임스와 친했던 필립이 불운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 이럴 수가! 필립은 자신이 총을 맞고 제대가 결정이 나서 힘들어했을 때 많은 도움을 준 친구였는데...... 둘은 그의 죽음을 기리며 말없이 알코올을 자신들의 몸에 차곡차곡히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샤또를 주문했던 것이었다. 아니 마린이였나?
"안되겠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네……."
존은 손을 치우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익숙한 천장인 게 집은 제대로 들어왔나 보다. 내심 사라의 집으로 향하지 않은 것에 감사를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생각 외로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숙취가 심각한 게 보통 심각한 게 아니 구나라고 생각을 했던 그의 머릿속에 아주 짧은, 하지만 강렬했던 영상 하나가 지나갔다.
"어?"
잠깐, 방금 뭐였지? 방금 무슨 병신 같은 생각을 한 거야! 머릿속에서 안개가 걷어지는 맑은 느낌, 아니 오히려 너무 맑아져서 머리가 따가울 만큼의 고통에 존은 그제야 자신의 몸에 닿은 따듯한 온기의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과거의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전라의 상태였고 그의 옆에는
자신의 그 짜증나는 동거인이 자신을 안은 채로 잠들어있었다.
런던의 하늘처럼
(Like sky of a London)
BBC Sherlock "Johnlock" slash fan-fiction
written by Cielo in October. 2010
1.
"그래서 할 말은 없고?"
확실했다. 셜록은 절대 유례가 없을 행동을 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언제나 한마디를 받으면 열 마디로 반격을 행했던 전설의 셜록홈즈님이 아니셨던가! 하지만 지금 그 셜록홈즈님께서는 자신의 시선을 피한채로 입을 꾹 다물고 '모르쇠-'로 일괄처리를 하고 있었다. 그 행동을 10분을 넘게 보고 있자니 존은 메시지로 대화를 나눌까하고 진지하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 나는 아주 고주망태가 되어있었을거야. 그렇지? 나는 집에 오는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깐. 그러니깐 뭐라해야 하나. 그래 자네도 무슨 숨겨놓았던 양주를 마시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거나 그러겠지. 그렇지?"
"……."
"무슨 말 좀 해보라고! 하다못해 '술을 마시고 맛탱이가 간 건 자네 아니냐, 나는 지극히 정상 이였거든'이라고 네 특유의 비꼼이라도 해보라니깐?"
셜록은 계속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양새가 엄마에게 단지위에 있던 과자를 몰래 먹은 것을 들켜서 걱정을 하는 꼬마아이 같았다.
"그래, 아무 말도 안하겠다고. 좋아 이 개 같은 자식아."
존은 소파에서 일어날려 하다가 하복부에 칼을 찌른 것 같은 통증에 다시 주저앉아야만 했다. 이걸 도대체 어떤 감정이라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몰랐다. 사라와 사랑을 나누고 동거권유를 들었을 때가 하루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기억도 나지 않은 채로 남자랑 관계를 가졌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하지? 뭐 적당한 사전표현이 있을까? 숙취가 전혀 해소되지 않아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분노. 그래 난 저 개 같은 자식을 죽여버려야해. 존은 근처 테이블에 있는 먼지 쌓인 종이문서나 책을 셜록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너 진짜 나한테 할 말 없냐고 이 개새끼야!"
셜록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존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존의 분노어린 공격은 테이블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 그러니깐 마지막으로 400페이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두꺼운 책을 셜록의 이마를 향해 던진 뒤에-까지 계속되었다. 셜록의 이마는 마지막의 두꺼운 책으로 인해 찢어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던지 말든지, 존의 분노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테이블을 던지면 모를까, 계속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그는 셜록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나?"
정확히 저 개자식(현재 존은 자신의 뇌에서 그의 이름을 개자식으로 등록해 놓은 뒤였다)을 두들겨 깨운 뒤 27분이 지났을 때, 존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뭘 기억한다는 거지? 술에 찌들어있는 날 눕혀놓고 그렇고 그런짓한거? 오, 진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 뭡니까. 오히려 감사해야할걸. 내가 만약 온전히 다 기억하게 되었으면 난 네가 잡아서 감옥에 처넣는 그런 사람들 비슷한 게 돼 버렸을 테니깐 말이야!"
존의 거친 입김이 방 전체를 감싸버린 것 같았다. 여전히 셜록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저렇게 소리칠 거면 왜 말을 하라고 달달 볶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셜록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하긴 누구라도 존의 저 사람하나 죽이고 온 듯한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겠는가!) 다행히도 존은 거칠게 씩씩거리긴 했지만 저 불쌍한 남자의 말을 끊어먹고 욕설을 퍼부을 정도의 악한은 아니었다.
"자네가 동거를 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는 거야. 사라와 말일세."
"내가 그 얘기를 자네에게 했다고?"
"그렇지. 그리고 내 대답은 '좋다'는 것일세."
…….
"그게 전부야?"
"그러면 내가 더 할 말이 있어야 하나?"
"사랑하는 여자와 동거를 하겠습니다."라고 커밍아웃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의 말은 참으로 단순명쾌했다. 마치 한없는 자애로움을 베푸는 어머니와 같이 그의 동거를 허락해주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존은 더 이상 화를 낼 기력이 사라진 듯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야 이 개자식아 너 진짜 나한테 죽어보고 싶어?!!"
아래층에서 허드슨부인이 이 소란을 눈치 채고 급히 걸어와 말리지 않았으면 존은 정말로 셜록에게 테이블을 던졌을 것이다.
몇 시간 후에 존은 짐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셜록은 최근에 항상 그랬듯이 한마디 말도 없이 휑하니 어딘가로 나간 상태였다.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건 미친 짓이야. 어차피 자신에게 있는 물건도 많지 않았다. 몇 벌의 계절 옷과 여섯 권의 책, 노트북과 아스클레오피스의 지팡이가 그려진 자신의 머그컵, 그리고 한 자루의 리볼버가 전부였다. 존은 마지막으로 리볼버를 손에 쥐었을 때 돌연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두근두근, 심장박동이 스테레오 해드폰마냥 귓속에 울려 퍼졌다. 이곳에 있는 동안 솔직히 내가 느낀 스릴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잖아? 사라의 동거제안에 내내 갈등을 유발했던 목소리가 다시 꿈처럼 그의 뇌를 파고들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내가 지금 무슨짓을 당했는지 보라고."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잖아. 이곳에 있는 동안 너는 항상 전쟁터에 있게 되니깐.
"웃기고 있네."
애써 너 자신을 부정하지 마.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뭘. 뭘 알고 있다고? 한심한 소리군. 내가 미쳤거나 술이 덜깬게 확실하지. 나랑 대화를 나누고 말이지."
존의 머릿속에서 들려온 엉뚱한 목소리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이 났다는 걸 두려워 한 나머지 숨어버린 것 같았다. 존은 잠시 멈춰 있다가 짐을 마저 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 허드슨 부인도 나가있었다. 다행인 일이야,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엔 너무 정신이 없으니깐. 나중에 정중히 죄송하단 말과 함께 자신의 결심을 말하겠노라고 다짐한 존은 현관문을 조심히 열었다. 그러더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누구에게 얘기하는 듯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미 전쟁은 끝났어. 더 이상 나 같은 부상군인을 부르는 전쟁터가 없더라고. 여기서도 말이야.."
존은 다시 현관문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을 닫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고 있는 듯 했다.
2.
영국의 건물 곳곳에서는 "NO SMOKING"이란 팻말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여기 이 런던 도심 밖의 한적한 공원에서 벤치에 멀뚱히 앉아있는 남자에게는 그런 냉혈한 말을 건네기 보다는 담배 한 개비가 더욱 필요해 보이는 듯 했다(물론 아직까지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금하는 건 아니지만 불쌍한 이 남자의 주머니에는 담배가 들어있지 않았다). 막상 짐을 다 꾸렸다지만 존은 도저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라의 집? 세상에, 불과 반나절 전에 그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생각해보면 그의 존심과 염치를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굉장한 실례발언이 분명했다. 자신 몸의 거의 반 정도는 돼 보이는 커다란 여행가방과 단 둘이 있는 공원은 적막하고 쌀쌀했다. 처음 그가 이곳으로 왔을 때 그는 흥분으로 몸을 꿈틀거렸다가(그의 곁에 있었던 불쌍한 느릅나무 한그루는 그에게 폭력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만약 근처에 지나가던 공원 관리인이 없었다면 그 나무의 신변은 어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몰랐을 거다.)도 급하게 침울해지는 듯 그의 존재감에 의해 공원의 열기는 한층 뜨거웠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안정을 찾은 건지 아니면 그저 지쳐버린건지 이제 그는 단지 멍한 눈초리로 허공을 훑고 있었다.
'그리고 내 대답은 좋다는 것일세.'
세상에 만난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박테리아보다 못한 존재가 있냐라고 물을 때 존은 언제든지 '네 그것은 셜록홈즈라고 합니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기억마저 온전치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동거인을, 그것도 애인에 대한 언급을 하는 동거인을 멋대로 침대에 눕히고 관계를 맺은 이 버러지 같은 놈은 아침에 일어나서는 당연히 동거인에게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뻔뻔스러운 대답을 하는 사이코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도노반경사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 자식은 진짜 사이코패스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는 분노보다는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왜 요즘 그 자식은 날 피한 것일까.
무슨연유로 나와 섹스를 한 걸까
그러면서 사라와 동거를 하는 걸 반긴다는 건 또 무엇인가.
"도무지 모르겠네.."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일반인이 어떻게 알겠는가. 존은 처음부터 셜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겉 표면을 핥는 식이였지 그의 깊은 구석까지는 단 한 번도 도달한 적이 없었다. 이상하고 대부분이 짜증난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셜록 그 남자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닌 사내었다. 나 같은 일상의 지루함을 못이기는 자들을 끌어당기는 매력. 그리고 좋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관계를 이어나갔다고 생각했었다. 그 사건, 모리어티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 그 사건 전까지는. 모리어티, 그는 셜록의 사건 모든 것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 그가 왜 셜록에게 병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건지 존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셜록은 자신과 존이 거의 죽을 뻔했던 그와의 만남 뒤에 그를 이해한다고 존에게 나지막이 말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그런 놈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 우리는 심심하니깐. 나와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규칙과 룰에 진절머리를 치고 우리의 세상을 원하고 있어. 하지만 이 좁은 세상에서 우리 같은 사람은 놀만한 운동장이 없거든."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존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같은 천재들에게 이 세상은 지루함이 가득한 세계였을 것이다. 학구열을 가진 대학생에게 초등학교 수학문제만을 끊임없이 풀게 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런 논제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존과 셜록의 사이에 껴있었다. 그 사건이후 셜록은 존을 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을 조수로 채용해주지 않았다. 무슨 사건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지도 않았으며 존은 단순히 뉴스의 수많은 사건 중에 하나를 추측해보는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신이 있을 때 셜록은 말없이 집을 나서서 밤 늦게가 되서야 돌아오기 일쑤였고 다시 아침 일찍 나가기 일쑤였다. 애인이라도 생긴 거 아니냐라는 존의 우스갯소리에 심각히 정색을 한 점을 제외하고는 존에게 별다른 감정표현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 존은 염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와의 관계에 매력적이던 그의 동거인은 자신에게서 담을 쌓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게 하나하나씩 쌓여진 벽이 어느 샌가 그의 눈조차 볼 수없게 될 정도로 높아졌다.
'그런데 왜, 대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정말로 이 개 같은 자식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
존은 만약에 자신이 조금만 더 어리고 지성적인 면이 부족했다면 그는 진작 이 이해할 수 없는 난제에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정말로 울어버릴까?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지성적인 자식을 울게 하는 여유를 선물하진 않았다. 존의 등 뒤에서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왓슨? 왓슨 당신이에요?"
"엘라?"
짧은 머리의 건장한 흑인 여성이 약간은 놀랍다는 눈으로 존을 쳐다보았다. 존은 군대에서 제대를 한 뒤 심리적인 문제로 많은 고통을 야기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효과는 그리 좋진 못했다. 셜록과의 동거생활 이후로는 일방적으로 상담치료를 그만두었는데, 간만에 만나게 되니 약간은 기쁘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하고 괜스레 쑥스럽기도 했다.
"여기서 뭣하고 계시는 거예요? 갑자기 치료를 그만 하겠다고 전화를 하더니, 그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당신은 지금.. 당신의 반만 한 여행 가방을 들고 있네요."
"아.. 이건.."
존은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급하게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라는 존의 빠른 두뇌회전보다도 빠른 화제전환을 구사했다.
"존.. 당신 더 이상 다리를 절뚝이지 않는군요!"
"아, 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다보니가 아니에요. 이건 진짜 놀라운 일이라고요. 얘기를 듣고 싶네요. 많이 바쁘지 않으시다면야 근처에서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게 어떤가요?"
아니 저는.. 처음에 존은 정중히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담 전문의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상황에 대해(물론 약간의 포장과 거짓을 추가해야 갰지만)설명을 하고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다.
"어.. 좋아요. 그러도록 하죠."
솔직히 말해 엘라는 존에게 있어 상담의로는 최악의 상대였다. 하지만 내담자와 상담자의 관계를 떠나 안부를 묻고 식사를 하며 최근의 근황을 나누기에 있어 엘라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간단히 식사를 한 뒤 후식으로 홍차를 즐기면서 느긋하게 대화를 즐겼다. 그녀와의 대화는 무언가 편한 느낌을 주었기에 존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불편함을 어깨에서 조금 덜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엘라는 종종 존의 블로그에 들려 그의 근황을 보고 있었다면서 꾸준히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죠?(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블로그활동이 뜸해졌더라고요 왜 그런 거죠?) 하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셜록이란 이름이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죠?"
"아, 예. 그렇겠죠."
제기랄! 존은 방금 전의 아주 짧은 느긋함을 다시 뺏긴 느낌을 받았다. 최근에 자신의 모든 불행을 가져다온 그 개자식의 이름을 듣자마자 전의 모든 걱정과 근심이 다시금 밀물처럼 그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혹시 크고 날씬한 몸매에 풍성한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는 아닌가요? 항상 정장을 입고 다니고.."
"그를 아시나요?"
"아, 역시나. 실은 최근에 조금 알게 되었지요."
설마.. 존은 애써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르며 조심히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 어떤 연유로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죄송해요.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역시나! 존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헛된 생각이 아니었다. 방금 엘라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도 아주 초보적인 실수를. 그녀도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담의는 자신의 환자에 대한 어떠한 정보라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셜록은 그녀에게 상담을 받고 있었다.
"엘라. 이게 굉장히 잘못되고 부도덕적인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걸 아시면 더 이상 저에게 물어보는 행동을 그만하셔야 해요."
한 번의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엘라는 마치 성벽 전체에 고루 기름을 부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존에게는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왜 셜록이 자신에게 니체의 철학론만큼이나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는지 알 수 있게 될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그는 급하게 일어나려는 엘라를 억지로 제자리에 앉힌 뒤에 손과 발이 닳도록 입으로 간청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요즘 그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를 당신이 아신다면 절대 그런 말은 할 수 없을거에요. 우리는 어떤 사소한 사건에 휘말렸었거든요. 사실 사소한건 절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그 뒤부터 그가 저에게 전에 대하던 행동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표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이 진짜 그 모습을 보셔야 해요. 저는 같은 한 방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하는 공동세입자에 이상행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자격이 있어요."
"…….당신 이였군요."
"네?"
"아, 아니에요.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니었으니 신경 끄세요. 이건 그저 혼잣말이니까요."
전혀 아니올시다. 엘라는 다시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채고는 존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말이 자신의 실수회복과 경력에 절대 좋지 않을 거란 걸 예측하고 있었다. 존 역시 그녀가 꺼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오늘 아침에 한 달 치의 분노를 표하지 않았다면 그는 커다랗게 소리를 쳤었겠지만 다행히도 기력이 다한 존은 소리를 내지르는 대신에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을 하면서 그녀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저에 대해 언급한 게 있습니까?"
"당신도 의사니깐 더 이상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거 아시죠?"
"제발요. 그의 행동이 저 때문이라면 약간의 힌트정도는 눈감아 주셔야 합니다. 그의 행동 때문에 제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봤는지 아십니까? 게다가 오늘 같은 경우에는!"
아차, 큰일 날 뻔 했다. 존은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한 오늘의 수치를 간신히 목 뒤로 넘길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둘 사이에는 싸늘한 적막의 벽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엘라 자신을 향한 압박에서 약간의 숨통이 트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엘라에게 있어선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셜록이 당신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건가요?"
"뻔뻔하게 묻지 마시죠."
"제 내담자에게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사람때문에 피해를 받고 있다면 그의 증상개선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요?"
"제가 계산하지요. 오늘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존은 자신의 커다란 여행 가방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카운터로 계산서를 들고 다가갔다. 하지만 자신의 지갑을 열어보고는 자신이 계산하겠다는 간 큰 행동을 후회해야만 했다.
3.
"원래 저는 이런 도움이 필요 없다 생각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이런 게 필요할리가 없지요. 이런 뻔한 접근법과 인지적인 치료법이라니.. 하!"
셜록은 자신 앞에 있는 흑인 여성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군요."라는 가벼운 긍정을 취할 뿐이었다. 셜록은 짧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 잠시간 침묵을 고집하다가 자기가 답답하다는 듯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아무래도 저에게……."
이건 말도 안 되는 거다. 셜록의 얼굴에 이건 말도 안 된다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엘라는 그저 그를 나긋이 쳐다볼 뿐이었다.
"…….후. 좋습니다. 아무래도 저에게 그러니깐.. 그..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감정이지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러니까. 제길! 이건 진짜 미친 짓이야. 난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셜록은 가벼운 신경적 발작을 일으킨 것 같았다. 엘라는 그저 셜록의 행동을 주시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그래. 이게 멍청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정말로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으니깐 이곳에 올 수 밖에 없었어. 알겠어요?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래요. 제가 어떤 이성(理性)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감정이지요?"
셜록은 작게 이를 갈았다.
"사랑이요! 아마 이게 이론적인 정황에 따르면 사랑이라는 감정이라 하더라고요."
".. 좋아요 셜록. 우선 이건 알아둬야 할 것 같아요. 사랑은 지극히 이성적인 감정중 하나에요."
"남자에게 말이에요!"
셜록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꽥 질러댔다. 엘라는 "그렇군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런 환자들을 만나는 것이 전혀 놀랍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상담의였다.
"당신이 틀렸어."
"..뭐가 말이죠?"
엘라는 항상 그렇듯이 다시 셜록의 인사에 맞인사를 해 주었다. 처음의 상담을 이후로 엘라는 셜록이 다시는 자신의 상담을 오지 않거나 약속을 어기면서 계속 뒤로 미룰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꾸역꾸역 약속시간에 맞추어 상담을 하러 나왔고 그때마다 그는 인사대신에 "틀렸어"라고 있지도 않은 정의에 부정을 표해왔다. 결국 엘라는 그의 '틀렸어'라는 한마디가 그의 혼란스런 감정을 내포하면서도 '내가 여기 왔습니다.'라는 인사치례같은 것이라 확정을 지었다. 꽤나 재미있는 남자다.
"전부 다. 세상에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상담의가 된 거지? 당신은 나를 만난 첫날에 사랑은 지극히 이성적인 감정이라 말했지만 당신이 틀렸어! 사랑은 하나의 질병 같은 존재야. 내가 하는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알아들었어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요!"
"그런가요? 좋아요. 그와의 관계에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요. 말씀해주시겠어요?"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요. 이건 하나의 질병 같은 거야. 마치…….마치 암같은거라고! 오늘 같은 사건만 해도 그래. 나는 그의 손목에 있던 할퀸 자국을 확인하지 않고 정신이 팔려있었지. 내가 만약 마지막까지 그 미친 듯한 감정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렸으면 다섯 명의 여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그 끔찍하고 사악한 악마에게 런던시내를 걸어 다니며 먹잇감을 찾을 수 있도록 허락 할 뻔했다고. 젠장!"
라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중얼거린 셜록은 곧 이어 정신을 차렸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을 받았다.
"오, 우리말입니까? 우리는 굉장히 좋습니다. 아무 일도 없거든요. 그냥 전적으로 나한테 피해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나한테 피해란 말입니다. 덕분에 오늘 모든 집중을 요해야 했던 사건을 해결하면서도 전적으로 나를 방해했어요. 알아요?"
"그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방금 말했잖습니까! 젠장! 내가 지금 무슨짓을 하는 건지."
셜록은 또다시 몇 가지 헛소리를 빠르게 읊어댄 뒤 어느 정도 침착함을 찾게 되자 좀 더 정중하게 엘라에게 말을 이었다.
"후, 톰슨. 항상 얘기하는 거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와의 관계를 개선한다던가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조언과 응원을 받으며 마음의 짐을 덜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빌어먹을 감정을 제 머릿속에서 영영 없애버리고 싶은 겁니다. 영원히요!"
사랑이란 감정에 무디고, 설령 그 사랑을 느껴도 그것에 젖어 행복감과 슬픔을 느끼기 보단, 그 감정을 증오하고 부담스럽고 수치감을 느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60억이 넘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에 대한 증오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적지 않을 거라 과감하게 추측을 해본다. 직장 상사와의 부적절한 관계, 헤이즐넛같이 달콤한 사랑을 하는 커플의 여자를 짝사랑하게 된 한 남성. 같은 동성에게 느끼는 야릇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 엘라의 앞에 앉아있는 불안하고 초조한 행동 속에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눈 안에 담은 이 사내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더라도 사랑이란 감정을 기존의 중력보다도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 사랑받는 법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서투른 것인지, 어느 쪽이 되었든 그는 사랑이란 감정은 자신에게 있어서 안 될 가장 무용지물한 감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왜 그 감정이 자신에게 무용지물 한 것인가는 셜록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 정말로 자신의 앞으로의 삶에서 필요가 없으며 방해만 될 것이라는 걸 예감을 해서일지도 모르고, 혹은 상대방에게 있어 자신의 감정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을 하고 있어 그 감정을 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번까지는 말이다.
그러니깐 존이 짐가방을 싸고 자신의 하숙집을 나온 뒤 런던외곽의 민박집에서 하루를 지새우고도 갈 곳이 없어 길포드까지 흘러들어갔을 때 셜록과 엘라는 상담약속이 잡혀있었다. 당연히 셜록은 어김없이 약속장소에 나타났고 엘라역시 셜록과 마주보며 앉아있었다. 하지만 셜록이 "틀렸어!"라는 인사를 하지 않으면서 엘라와 셜록은 오늘의 상담만큼이나 거북하고 어색한 상담이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셜록의 경우에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표현하려면 "죄송합니다. 항상 미루고 부정해왔던 감정이 폭발해버려서 제가 상대방을 덮쳐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말을 꺼내야 했으며, 엘라의 경우에는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당신이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 댁이 내 상담을 받고 있다 폭로를 해버렸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적어도 당신이 최소한의 양심이나 수치심, 자존심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약간의 거짓말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오직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양심으로 인해 자신의 치부를 상대방에게 말 하겠는가? 당신이 어떻게 생각을 할진 모르지만 이 똑똑한 두 남녀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확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숨기는 게 있으면 그 행동은 자신도 모르게 겉으로 표출되는 법이었다. 두 사람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너무 조심히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상담을 진행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혹여나 상대방이 쳐다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서로는 눈조차 마주칠 수가 없었다.
"좋아요. 요즘은 어떠세요?"
결국 상담사의 직업으로 면담 자를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는 엘라가 말을 꺼냈다.
"네. 좋습니다. 그럼요."
셜록은 경직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남자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색한 미소였다. 그 모습은 꽤나 괜찮았는데 아쉽게도 엘라는 그에게서 시선을 최대한 멀리하려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미소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셜록은 침통한 표정으로 모든 창피와 죄책감을 뒤로하고서라도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해야 하나 심각히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75파운드씩의 고상담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조금 있기도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결국 억제하지 못한 감정의 결과로 상대방-그러니깐 존-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이 일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와 나의 관계에 가장 접점선이 없는 타인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게 한층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이 당장이라도 터지지 않고서는 온 혈관을 꽉채운듯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뭐라 말해야 하지.
셜록의 눈동자는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소의 엘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엘라는 어제의 자신의 잘못에 모든 생각이 치우쳐있었다. 결국 셜록이 말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전까지 그녀는 셜록의 벅찬 감정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러니깐 엘라에게 말한 셜록의 사정은 이랬다.
"저는 고문탐정입니다. 세상하나밖에 없는 제가 만든 직업이죠. 하지만 그런 모든 상황을 뒤로하고 말하자면 저는 제 자신의 직업 때문에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죠.(아, 미안해요.) 안 그래도 방금 제가 한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에도 수치스러움에 제 머리를 총으로 쏴버리고 싶단 말입니다! 알겠어요? 세상에 내가 어떻게 울 수가 있지. 이건.. 이건 진짜 말이 안 돼. 유치원시절에도 단 한 번도 울어본적이 없는 내가.. 그래요! 저 인격 장애 있어요. 그러니깐 그만좀 쳐다보라니깐요?('누가 그런 말 했답니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결국 그의 대화 모두를 알려줄 수 없음에 사과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의 불필요한 신경발작증세와 자기자랑을 제외하고 핵심을 말하자면 이랬다.(물론 대화도 매끄럽게 했고 그가 느끼고는 있지만 설명하지 못한 말을 조금 추가하긴 했다. 그러니깐 아래의 대화가 셜록이 곧이곧대로 말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는 처음부터 어떤 흥미와 매력을 끌던 사람 이였습니다. 자기감정에 솔직했고 무엇보다 저를 괴물 보듯이 하지 않았으니깐 요. 물론 제 이런 성격 때문에 몇몇 불만과 불화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누구보다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챙겨주었습니다. 이런 사이를 아마 친구사이라고 하겠죠.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아마 그때부터 싹텄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에서 저와 그 모두 위험에 쳐해있었죠. 전적으로 저 때문에 위험에 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저를 구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 경험은 처음 이였죠. 누가 나를 위해서 자신을 위험에 내던질 수가 있지? 그 상황은 전적으로 그에게 불리했고 그에게 위험했던 상황 이였음에도 저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저는 그저 잠시간의 안도의 상황에서 그에게 괜찮냐고 끊임없이 묻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요. 그 이후에 있던 모든 일을 뒤로하고 결국 둘은 가까스로 신체적으로 안전을 보장하게 되었고 아마 그때 처음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죠. 당연히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이였으며, 무엇보다 그날의 일로 알게 되었어요. 저랑 있으면 어떤 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아니 그 사람이 아니어도 저와 함께하는 이상 그는 항상 위험에 도사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항상 그런 상황에 놓여있었으며 그런 위험의 스릴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저를 제외한 어느 누가 그런걸 원할 것이며 또 누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해서라도 위험에 쳐하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도 그러한 위험을 어느 정도 즐기는 사내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우리는 존이 군인 이였으며, 그 상황에서의 스릴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야한다). 결국 저는 그를 저의 전쟁터에 올 수 없도록 했습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 향한 저의 감정을 숨길 수 있었지요. 그와의 모든 접촉을 금지했습니다. 대화도 최소한으로 했고, 제 사건에 더 이상 그의 도움과 찬사를 바라지도 않았지요. 그가 뭐라도 길게 얘기를 하려하면 항상 자리를 피해왔습니다. 또 들어왔을 때 그가 침대에서 잠이라도 자고 있으면.. 저는 제 자신의 이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다시 집을 나가서 공원에서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항상 괴롭고 불편한 하루하루를 지속하게 되었고 그 직후부터 이곳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쳤을 때 셜록의 새하얀 얼굴은 홍당무만큼이나 붉어졌다. 수많은 가벼운 신경적발작과 워낙에 빠른 템포로 이야기 하는 바람에 그의 호흡은 꽤나 흐트러져 있었다. 만약에 거울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는 "도저히는 못하겠어! 이건 정말 못 말하겠다고!"라고 상담도중에 뛰쳐나갔을지도 몰랐겠지만 다행히도 그들이 있는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엘라는 이 불쌍한 사내를 쳐다보며 "많이 힘들었겠군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셜록의 숨이 조금 고르게 되었을 때, 그는 한순간 말하기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저께밤이였습니다. 그가 잔뜩 취해서 들어오더라고요. 저는 언제나 그렇듯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가 저를 잡더니 진지한 얼굴로 저와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니 살짝 우는 것 같기도 했어요. 손아귀 힘이 워낙 센데다가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데 뭐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얘기를 듣기로 했죠. 가벼운 소파에 앉아서 최대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이야기를 들으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싸구려 양주냄세가 그의 몸을 타고 저의 코를 간지럽혔죠. 약간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를 두근거리는 심장과 하모니를 이루는 그 화합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죠. 하지만 대충 저에 대해서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렇게 몇 분간을 귀엽게 투정을 대더니 갑자기 말을 끊더라고요. 그때 잠시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주저하는 눈빛을 하더라고요. 젠장,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최대한의 침착성을 유지하고 힘겹게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할까하는 마음에 조바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더니 최대한 조심히 저에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실은, 오늘 사라에게 동거를 하는 게 어떤가 하는 제의를 받았다네. 솔직히 지금 자네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건데 나와의 생활을 별로 만족하는 거 같진 않더군.]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그가 더 이상 이곳에 없다고?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에 대답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를 보내면 더 이상 이런 생활은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저 자신만의 일에 집중 할 수 있게 되겠죠. 아주 가끔 그가 저를 찾아오거나 제가 그를 찾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다른 사람들처럼 나와의 만남을 꺼리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더 이상 그의 체온이나 흔적이 집에 남아있지 않게 되면 제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니깐 제가 그와의 대면을 피하긴 했지만 그를 부정하지는 못했다는 게 사실입니다. 그가 나간 뒤의 방에는 그의 흔적이 가득했지요. 그의 노트북, 그의 다른 개인적 물품. 냉장고에 하루라도 없으면 그가 견디지 못하는, 그가 마시다 남긴 우유라던가. 저는 솔직히 그런걸로 그와의 회피로 인한 불만의 상황에서도 일종의 위안을 느꼈나봅니다. 하지만 그가 이곳을 떠난다는 건.. 정말로 그 모든 게 사라진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가 저를 떠난다면 그는 더 이상 저로 인해 위험에 노출 될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저는 그때 [좋네! 존. 둘의 사이가 잘 되기를 바라겠네.]라고 바로 대답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그에게서 풍겨지는 술내임에 이미 취해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었죠. 하지만 그 뒤로 그가 애처로운 듯이 외쳤습니다. [말해보게 셜록. 날 보고 말해봐. 내가 떠났으면 좋겠나? 이것으로 모두 끝내고 내가 그녀에게 가기를 바라나?] 그가 무슨의도로 그렇게 말했는지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다만 최소한의 이성이 돌아왔을 때 침대위에서 그가 내 아래에있다는걸 알게 되었죠."
"..그러니깐 그게.. 그.. 했다는 건가요?"
"아니요!..아니 네! 했습니다. 그래요 저랑 그랑 섹스 했다고요. 왜요 당신이 원하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러니깐……."
솔직히 셜록이 자신의 상태를 순순히 순응하고 상대방과의 관계가 개선이 되어서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존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마 그녀는 (그래서는 안되지만)남 몰래 존을 좋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상담이 필요 없다 했을 때 약간 가슴이 허해지긴 했었고, 어제 그를 만났을 때 그에 대한 반가움과 셜록이 사랑하는 상대임을 알았을 때 죄책감과 같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셜록의 엄청난 커밍아웃에 그녀는 그의 발언에 대해 수긍을 해야 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만 어제 순간적으로 지나간 존의 복잡한 심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침투가 되었다. 아 그래서 그랬던 것이었군..
"뭐가 말이죠?"
그녀의 혼잣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셜록은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놓칠 리가 없었고, 그것은 그녀를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아뇨. 그러니깐 그.. 표정 말이에요"
엘라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물론 그녀는 그 표정의 대상을 존이라 말했던 것이었지만, 전날의 그녀와 존과의 사건을 모르는 셜록으로써는 자신의 표정을 말한 거라 생각하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다음날 깨어났을 때 가슴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한층 가벼워 진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는 저에게 엄청난 분노감을 표했지요. 아, 그게 나쁘거나 상처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게 오히려 저의 결정을 확실하게 했거든요."
존의 짐가방.. 그녀는 셜록의 대답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조심히 셜록에게 물어봤다.
"..그에게 뭐라고 말했나요?"
"당연히 그를 놓아줬지요. 더 이상은 그의 흔적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걸 잘 알게 되었으니까요."
셜록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자신에게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일종의 허무감이었다.
4.
[당신의 친구가 많이 아파요.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ET]
베이커가에서 나와 정처 없이 떠돌던 존이 길포드로 흘러들어가 여관에서 하루를 지새우고 9시가 넘어서야 부스스하게 일어났을 때었다. 이틀 전에 우연히 만났던 엘라에게서 뜬금없는 문자가 왔을 때 존은 그녀가 보낸 문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일분이 넘도록 머그잔을 멍하니 든 채로 문자에만 집중을 해야 했다. 친구라니? 누굴 말이지?
"아"
자신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셜록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존은 멍청히 있다가 머그컵을 떨어트렸다. 아직 열기가 가득한 커피가 테이블을 넘어 자신의 바짓단을 적셨을 때야 머릿속에서 알람이 울린 듯 벌떡 일어난 존은 급하게 바지를 털어내고 차가운 물로 커피를 쏟은 부위를 식히면서 잠시 동안 그 문자를 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바지를 갈아입고 방을 비우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 존은 다시 그 문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 해 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문자의 순수한 의미보다는 셜록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복잡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간신히 정리한 것 같았었는데 작은 반응에도 폭팔할듯이 들끓는 그의 생각에 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녀석은 친구도 뭣도 아닌데말이지. 그나저나 왜 이 여자는 오지랖이 넓은 거야
도무지 그녀석이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 후로 연락 한 번도 없이 말이야.
아니 연락 따위 안오는게 낫지. 뻔뻔하게 어디에 연락을 한다는 거야.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근데 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거야?
[네 톰슨입니다.]
"엘라? 존이에요."
[아. 존 연락해주셨네요]
저녁이 되기까지 존은 한동안 정지되었던 사고가 다시 가동을 시작하면서 지난 시간동안 멍하게 있던 것에 반작용을 일으켰다. 결국에 머리가 평상시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바람에 존은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본래 예상대로라면 좀 더 나아가서 기차를 타고 맨체스터로 향해 대학교때 친했던 친구의 집을 방문해 며칠간 신세를 졌어야 했었지만, 결국 존은 그 계획을 잠시 보류해두고 엘라에게 전화를 하는 걸로 협상을 보았다(아무렴 자신을 엿 먹인-보통 엿 먹인 게 아니라 자기의 무언가를 산산조각을 내버린- 그 남자의 병든 얼굴에 축하한다고 팡파레라도울리고 싶은 괜한 오기가 작동한 것이라고 존은 스스로를 정당화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여러 가지로 말을 해줄 거란 믿음과는 반대로 그녀는 [아무래도 당신이 진찰해보시는게 어떨까 싶어서요. 의사잖아요. 친구사이신데 잠시 집에 들러서 상태라도 봐주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로 간략하게 '집에 나가서 네가 봐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나이도 있는데 아프면 알아서 병원을 가겠죠. 그리고 박사님 그녀석이랑 저는 친구 아닙니다."
[그래도 잘 아시잖아요. 안색이 안 좋아서 병원이라도 가보라 했는데 갈 생각을 안 하니깐 상담의로써 걱정이 되서 부탁을 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정말로 아프면 구급차나 불러주시는게 상담의로써 최선의 일이라 생각하는데요."
엘라에게 잘못이 있는 게 절대적으로 아니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존은 괜히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정말 이 여자는 갑자기 오지랖이 넓어진 거지? 왜 꺼림칙한 사이를 인식하지 않고 지 멋대로 나가는 건지! 존은 이대로 "수고하세요."라고 전화를 끊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 그녀에게 시기심과도 같은 감정이 든 존은 저도 모르게 전화기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가 무슨사정으로 당신과 상담을 하는지는 내 알바 아니지만, 괜히 저랑 그 사이에 간섭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이 셜록과 특별한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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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RRR]
런던은 오늘도 흐렸다. 얕은 소나기가 촉촉이 런던의 땅을 적시고 있었다. 셜록은 자신의 하숙집, 그러니깐 베이커가 221B번지의 소파에 누워있었다. 조명하나 없는 방은 뿌연먼지같은게 표면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는데 마치 19세기 말경 기계가 돌아가지 않을 때의 어둑한 공장을 연상케 했다. 그러한 방안에서 울려 퍼지는 핸드폰의 벨소리는 적막감을 더욱 고조시키게 했다. 하지만 셜록은 자신의 얼굴에 두 손을 포개어 있을 뿐 전화를 받겠다는 어떠한 작은 행위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누구에게 전화가 왔는지 슬쩍 보려하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전화가 간절한 몇몇 사람들은-특히 레스트레이드 경위- 애간장이 탈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의 셜록에게 그런 게 무슨상관이랴! 그의 머릿속은 더 이상 런던의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 사악한 악의 근원들이나 영국의 암암리에 악한 손길을 뻗고 있는 사악하고 온갖 기묘한 범죄를 향해 엔도르핀이 솟구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을 안 하자고 마음을 먹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야 겠다고 더욱 노력을 해봤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은 갑작스레 자신의 공간을 타고 들어온 알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의 침입에 과부하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의 뇌의 혼잡한 신경들을 지나 깊숙한 그의 의식 속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만약 셜록이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머릿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에게 열렬한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당사자임을 알았다면 어떤 행동을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힐끔거리며 발신자가 누구인지도 확인하려 하지 않는 그의 못된 심보로 인하여 자신이 원하지 않게 현실에서의 그 남자를 배척하고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짓을 한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이 된 건지 셜록은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다. 톰슨에게 자신의 모든 사정을 말해버린것? -자신의 속내를 전부 털어 내버린 셜록은 그 후에 잠시 얼굴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니면 자신이 결국 자제하지 못하고 존을 덮쳐버린것? 그것도 아니면 그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 것? 아니면 그와 친구가 되고 싶다 생각한 것? 아니면 그와 만나버린것?
"대체 알게 뭐야! 뭘 하던 이미 끝나버렸다고! 제기랄!"
셜록은 소파 근처에 있던 아무 물건이나 집어서 벽을 향해 강하게 던져버렸다.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울려 퍼지던 벨소리가 잠잠해졌다. 그가 물건을 맹렬하게 던진 벽면에는 그 옛적 자신이 화가 나면 버릇없이 벽에게 화풀이를 한 총알자국이 선명했다. 그때는 존이 자신의 행동을 향해 맹렬히 비난을 퍼붓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자신에게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관심을 보여줄 때었다. 이제는 그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멍청한 벽만 남아있었다. 셜록은 쓴웃음을 한번 짓더니 다시 소파에 맥없이 누워버렸다.
나도 알아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나는 진짜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이야.
그에게 있어선 늘 있던 사람들 간의 관계였다. 물론 그 관계 간에 느끼는 감정은 처음 겪는 혼잡한 매력이 있었지만 그것도 곧 괜찮아 지리라. 곧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오히려 잘 된 건이라고 셜록은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어쩔 수 없어 했으며 결국 자신을 주체할 수 없자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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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음성 메시지를 남기기 원하신다면 ‘삐’소리가 끝난 뒤…….]
1분 넘게 울리던 착신 음이 갑작스럽게 수신불가를 알리자 존은 화를 내야 하나 걱정을 해야 하나 심각히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의 번호를 보고선 종료버튼을 누른 게 분명했다(그렇다면 가만둬선 안 되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성난 손가락으로 다시 셜록의 번호를 찍어 통화버튼을 눌렀을 때부터 내내 수신이 거부가 되자 마음에 조급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끝까지 사람을 엿 먹이려고 하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욕인들 어떠하리. 셜록이란 이 사내는 정말 자신을 엿 먹이는 존재임에 분명했다. 자신에게 잊지 못할 굴욕감을 선사해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애간장을 타게 하는데도 선수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존은 가장 화가 나있었다. 그에 비해서 자신은-
'아냐 그건 아니야!'
존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진짜 미친짓인게 분명하다고 존이 생각했을 때 '부르르'하는 진동이 손을 타고 넘어왔다. 사라에게서 전화였다. 그제야 존은 자신이 지난 3일간 사라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사라의 모든 걱정스런 문자와 연락을 무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손은 이미 종료버튼을 눌렀다 는걸 알게 된 그는 자신에게 적잖은 실망을 했다. 사라에게 느껴지는 죽을듯한 죄책감. 하지만 이러한 죄책감은 슬슬 자신을 타협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지금 자신은 셜록과 대화가 필요했다.
"후. 그래 나는 내 플렛메이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성급하게 열 내지 않기. 진짜 성급하게 열 내지 않기."
괴상한 플렛메이트와 석 달이 넘게 생활을 하다보면 그 괴상한 버릇의 일부를 모방하게 된다는 논문으로 누군가가 주제를 쓴다면 3일 만에 볼품없이 어기적거리며 221b번지의 문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 남자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말하고 싶다. 그의 공동세입자인 셜록홈즈는 본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습관처럼 여기던 사내였었고 존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행동이 셜록의 행동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셜록 그런 행동을 흥미롭게 여기긴 했지만 절대 보기에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고 손잡이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존은 우연찮게 외출을 준비하던 허드슨 부인이 문을 열면서 그의 무자각 증상을 끝낼 수가 있었다.
"에구머니나! 왓슨박사님"
"허..허드슨부인"
"삼일동안 연락도 없이 어디 갔던 거예요?..웨일즈 지방이라도 갔다오신거에요? 짐이 산더미 만하네요."
"아, 그게……."
"다 큰 어른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웃긴 일이죠. 그나저나 셜록이 많이 걱정돼서 큰일이에요. 물론 저런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지만 그때는 왓슨박사님이 있었으니깐 요."
[당신의 친구가 많이 아파요]
존은 자신의 심장이 철렁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셜록은 사건을 해결한 뒤에 또 다른 자극이 없을 때마다 며칠간이고 한마디도 없이 침대나 소파에만 누워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엘라의 메세지때문일까 아니면 현재 셜록에게 반응하는 모든 감정이 민감해진 것일까, 그는 자신의 교감신경이 재빠르게 반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라도 정말 어딘가 심각히 아픈 거라면…….
"실례할게요."
존은 현관문에 자신의 짐가방을 내팽개친 채로("어머 왓슨박사님. 저한테 이거 들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도둑맞을 것 같으니 현관 안으로만 들여놓을게요.") 성큼성큼 그들이 함께 지내던 2층으로 올라갔다. 닫힌 문고리를 세게 비틀어보았지만 문은 단단히 잠겨있었다.
"열쇠가 어디 있을 텐데.. 젠장!"
그러고 보니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을 하고 테이블위에 멋대로 열쇠를 던져놓고 나왔었다. 존은 순간적인 어리석음을 한탄한 채 애꿎은 문고리만 거칠게 돌리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은 묵묵부답이었다. 허드슨부인이 그가 아직 있다는 투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존은 방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분명 불도 키지 않고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소파에나 누워있겠구만.
"...후. 좋아 셜록. 나일세 존."
묵묵부답. 존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객전도된 입장이로군.. 피해자는 나인데 말이지.
"셜록. 잠깐 문 좀 열어보는 게 어때?"
"……."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깐 문 좀 열어줬음 좋겠는데."
"……."
문 너머에서 이 개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존은 쓴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좋아. 내 얼굴이 보기 싫다면 대답이라도 하지 그래? 최소한의 예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
"젠장 셜록, 대답이라도 해보라고!"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결국 가슴속 깊은 곳에서 존은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다시금 토해내기 시작했다. 온갖 욕지거리와 셜록에 대한 온갖 비하발언을 내뱉었지만 셜록은 역시나 '없습니다.'라는 침묵을 연출했다. 과연 이 말을 들으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존은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 자각도 못하는 상태에서 셜록의 반응을 알고 싶어 했다. 결국 이웃집에서 "무슨 일 있어요?"라는 짜증과 걱정스런 방문이 오기 전까지 존은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하지만 이웃집의 여자에게 현관문을 열어주며 "아무 일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이성까지는 되찾지 못하고 단지 침묵만을 유지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별말 없이 돌아가 주었다).
'그런 수치를 당하고도 왔는데 나는 겨우 이런 대접을 받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 건가?'
이제 존에게는 셜록에 대한 분노보다는 허탈감과 괴로움이 가슴을 메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뭐를 하더라도 그에게는 별게 아닌 일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날의 섹스라고 할지라도 사실 그에게는 별 의미 없는 행동 이였으리라.
"실은 너에게 거짓말 한 것이 있어. 그날의 모든 일이 기억안나는건 아니야. 솔직히 자네 얼굴을 보며 온갖 욕설을 다 뱉고 싶어 돌아온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날의 일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싶었네."
"……."
"솔직히 난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결국 모든 극단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을 한건 너였는데 생각해보면 모든 피해는 내가 받았단 말이야. 이해가 가나? 일말의 미안한 감정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행동하진 않겠지.. 그래 내 잘못이야. 위대하신 셜록홈즈님을 내가 항상 귀찮게 했던 거구만. 그냥 내가 있는 것 자체가 너에겐 불편감이었나보군."
"..."
"이봐 셜록. 나도 참을 만큼 참았고 이젠 나도 내 자신에 대해 너에게 흔들리지 않고 주체성을 확립할 시기가 온 것 같아. 너와 한집에서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굉장히 많이 너에게 영향을 받고 살아갔다고 생각했으니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존은 확신을 굳혔다. 이번에도 아니라면…….
"그러니깐 많은 시간은 주지 않겠네. 1분정도면 네가 충분히 생각하고 정의를 내리고 행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겠지. 1분 동안 네가 다시금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 문을 열게. 그럼 내가 문 안으로 들어가 너와 얘기를 나눌 거야. 하지만 만약 끝까지 자네가 나와 얘기하기를 원치않는다면 더 이상 나도 뭐라 하지는 않겠네."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잠시 후 강한 어조로 말을 덧붙었다. 그것이 셜록에게 전하는 경고였는지 아니면 자신 스스로에게 전하는 다짐 이였는지 그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대신 이 이후에 다시는 날 볼 수 없을 거야."
5.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자신을 감싸왔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네.'라고 생각하면서 존은 살며시 눈을 떴다. 창문너머의 하늘은 지독히도 어둡고 우중충했고 역시나 부슬부슬하게 비가 내렸다. 그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
자신의 뒷목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을 때 존은 자신이 나흘전과 같은 상황에 쳐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참 난처한 입장이로군.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비명을 지른다던가 셜록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그의 신체에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자신을 안고 있는 셜록의 팔을 자신에게서 슬며시 떼어놓고 가볍게 샤워를 한 후 옷을 차려입고는 외출준비를 했다.
"어딜 가는 건가?"
"아아.. 잠깐 밖엘 좀."
셜록은 별다른 말없이 침대위에서 지그시 존을 쳐다보았다. 한쪽팔로 머리를 괴고 즐거운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셜록을 존은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아냐 지금 뭔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내가 미쳐가나보군.'
존은 고개를 절래 절래 젓더니("뭐하는 건가?" 셜록이 흥미롭다는 듯이 존을 바라보았다.) "다녀올게"하고는 살며시 문을 닫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라고 할 때 옆에 자신의 짐가방과 접이식 우산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웃어야 되나 울어야 되나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는 존은 우산만 살며시 든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사실 존은 약속이 있거나 어디를 가야할 계획은 없었다. 아직은 셜록과 단 둘이 방안에 놓여있기가 뻘줌하다는게 그의 입장이었다. 한손에 우산을 들고 그는 천천히 런던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출근대가 지난 오전시간대라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괜스레 기분이 저하되는 그런 거리었다. 도심가로 나가볼까하고 생각을 하다가 이내 어깨를 한번 들썩이더니 그는 그냥 한적한 공원 쪽으로 발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니깐 지금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계속 해서 설명하자면 그 뒤의 일은 꽤나 극적이었다.
실은 셜록은 당연하게도 잠을 자거나 해서 존의 말을 못들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집중을 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과 그를 막는 유일한 벽인 문이 존에게 여섯 번이나 발길질을 당했다는 것까지 추리할 수 있었다(존은 왼쪽어깨가 아직 뻣뻣한 감이 있어서 손으로 격렬한 행위를 자제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런걸 제외하고도 주먹으로 친 것보다 더욱 둔탁하고 위협적인 소리가 났으니 당연히 발길질이겠지).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존은 다시 되돌아 갈 것이다. 지금 자신이 존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다니! 셜록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일을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감과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잘 넘기기만 한다면……. 지금 멍청한 자신의 상태를 잘 넘기기만 한다면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질지도 몰랐다. 아니 생각할 시간이 주어져서 뭐하겠다는 거지? 셜록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를 사라한테 보내줘야 한다. 내가 그를 원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이야. 하지만 셜록은 귀를 틀어막거나 문 앞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는 존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왕 갈 거면 좀 더 나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가주게. 적어도 나에게 좀 더나마 관심을 가져줘.'
셜록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저렇게 화를 내는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게 좋아. 하지만 눈을 감는 동시에 그의 성난 목소리도 라디오의 전원이 꺼진 것처럼 멈추어버렸다. 셜록은 자신이 눈을 감는 동시에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된 건지 아니면 존이 소리치는 꿈에서 깨어난 건지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야 했다.
"실은 너에게 거짓말 한 게 있어. 그날의 모든 일이 기억안나는건 아니야."
셜록은 문을 바라봤다. 어두운 문 너머로 존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침착해졌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전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는 또한 갑자기 말을 바꾸더니 자신에 의해 셜록자네가 불편했겠다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자신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심어놓았다. 그것은 절대 자신에게 있어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더니 그는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1분의 시간동안 문을 열지 말지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했다. 당연히 그는 문을 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아니 먹었었다.
"대신 이 이후에 다시는 날 볼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그 다음 셜록이 생각나는 것은 문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는 존의 얼굴이었다.
존의 입장으로 넘어간다면 그는 다시는 자신을 볼 수 없을거다라는 짓궂은 말을 내뱉은 지 10초도 되지 않아 거칠게 문을 열어버린 셜록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마 문을 열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렇게 빠르게 환영해줄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한 존은 눈만 껌뻑껌뻑 거릴 뿐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라이브 쇼를 한걸 전부 듣고 있었단 얘기로구먼. 얼굴이 붉어지고 거칠게 한마디나 쏘아줄까라고 생각했던 존은 셜록의 얼굴을 보고는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잊어야만 했다. 먹지도 씻지도 않았는지 부스스한 얼굴엔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이 남자가 울었다고? 아이언메이든에 넣어놔도 피는 흘러도 눈물은 흘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 남자가?'
설마 자신 때문에 운건가? 하는 마음에 존은 괜스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야, 정말로 아파가지고 고통이 심해서 운 걸지도 모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아프면 저 남자가 울 수 있지? 췌장암 말기정도는 돼야 울지 않을까?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이 잠시 존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애써 현실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존은 잡다한 생각들을 하나하나 뇌의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은 뒤에 셜록을 쳐다보았다.
"셜록?"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지각하면서도 존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광경 목격하기'란 종목으로 기네스 보유자가 되지 않을 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자국이 선명한 셜록에 이어 이번에는 그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진귀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셜록은 존을 바라보면서 소리는 없지만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아마 한번이라도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존은 이전에 있어본적도 없을 뿐 아니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건 분명 셜록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래서 그 둘은 한동안 열린 문을 사이에 끼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는게 고작이었다. 어쩔 수 없네.. 결국 존이 주춤주춤하면서 셜록을 안아주면서 다독여줄 수밖에 없었고 그제야 두남자의 말없는 화해가 이루어졌다.
"가지 말게."
"뭐?"
어찌어찌 방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각각의 소파에 앉아서 상대를 견제하기에 급급했었다. 그러다가 심신 적으로 진정이 된 듯한 셜록이 뚱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척 보기에도 골이 날대로 나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살짝 입을 삐죽거리는 게 귀여워보인다고 존은 생각했다.
"난 제멋대로고 반사회성장애까지 있는 멍청이일세. 그래 천재긴 하지만 멍청이지. 제길 내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라고 운을 떼더니
"어쨌든 내 요점은 내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거야. 그리고 이제는 다시 놓고 싶지 않고, 내 성격상 이제 그러지도 않을 거라 얘길세."
"..그게 나라는 건가?"
"그렇지. 그러니깐 사라한테 가지 말고 나랑 있어줬음 좋겠어."
라고 쑥쓰러운듯 말을 이었다. 아마 그가 한 말은 그가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법이였으리라. 물론 마지막에 들릴 듯 말듯 "부탁일세."라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존을 존중해주는것도 잊지 않았지만. 존은 그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머리가 혼잡했다. 남자에게 고백이라니! 그것도 자신이라고는 수십억의 사람 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은 남자에게 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사랑의 은어를 속삭이는 여인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이 혼잡한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작지만 강렬한 감정같은게 피어올랐다.
잠시 후에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희열. 그는 기뻤다. 저 남자에게 다른 사람과는 다른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합쳐봐서는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의 고백 같지 않은 고백에 난색을 표하고 친구이상의 관계를 원하는 셜록에게서 등을 돌리고 사라에게 가야 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행동 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머리로는 깨달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어이가 없는 듯 작게 킬킬 거릴 뿐이었다.
"뭐하는 거지?"
"그러니깐.. 그게 네가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고백법이라 이건가? 응?"
"고백이 아니...!.. 그래 고백일세. 그게 고백이야. 그거에 뭔 불만이라도 있나?"
웃어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 절대 말이 안 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존은 지금 이 심각한 상황이 너무나도 웃겼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내가 그 제멋대로이고 천재적인 영감을 발휘하던 그 셜록홈즈라고? 징징거리다가 수줍게 나한테 고백을 하고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키만큰 어린애가? 바짓속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마 사라의 전화였을 거다. 하지만 그는 이 멍청한 상황을 즐기느라 그 진동을 무시하기로 했다. 전화를 들고 "왓슨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대신 셜록을 골려주는 것이 현재로써는 더 유쾌한 일일 것이다.
"좀 더 노력해보는게 어때? 나는 살아생전 그렇게 멍청하고 어리숙한 고백 법에 넘어가는 여자를 본적이 없어서."
"뭐?"
셜록의 얼굴이 획하니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자신도 무안한지 두 손을 맞대고 비비적거리거나 두 손을 맞대어 모은 채 입으로 끌어당기는 등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마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존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셜록을 쳐다보다가 문득 왼쪽이마에 붙여진 반창고를 발견했다. 분명 삼일 전에 자신이 던진 두꺼운 책모서리로 인하여 생긴 상처를 가린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지금의 자신과 셜록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참으로 묘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저때까지만 해도 지금 자신 앞에 쑥쓰럽다는듯이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남자를 평생가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라고 분노로 다짐을 했었는데 지금은 귀엽다고 느껴진다니. 그러다 문득 존은 셜록이 자신을 다시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뭐 그럴듯한 고백법이라도 생각난 건가?"
"…….키스해도 되나?"
"뭐?"
어이없는 녀석일세. 존은 '웃기지도 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눈앞에 있는 셜록이란 남자는 전에도 말했듯이 한번 생각을 하고 판단을 내리면 누구보다도 행동하는 게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맞은편 소파에서 일어나 존을 향해 다가왔다. 셜록과 존의 거리가 1피트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셜록과 존 가운데에는 이상한 공기가 감돌았다. 무거운 분위기라기보다는 끈적끈적하고 축축하지만 달달한 분위기였다. 글쎄..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존의 설명을 빌리자면 그런 상황에서 키스를 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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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다시 나란히 하룻밤을 보낸 뒤에 존은 어제와 같은 기분이 느껴지지 않은 것에 허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의 그 달달했던 기분은 어디로 갔을까. 오히려 집을 나선 지금 자신의 기분은 비 내리는 런던의 하늘같은 느낌이 들었다. 축축하고 음습했다. 셜록이 보이지 않자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걱정이 엄습했다. 사라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앞으로 정말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아예 전화의 전원을 종료해버렸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가 그들의 집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섣불리 동거를 하자고 말을 꺼낸 것 때문에 존이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것이라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괜스레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르고, 여하튼 존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현재 자신의 입장을 알려줘야 한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사건의 배후를 알게되었을때의 사라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나 목소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비단 사라뿐만이 아니었다. 허드슨부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셜록과 자신의 지금관계를 알게 된다면 자신들을 어떻게 대할까. 분명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지는 않을 것이다('허드슨부인은…….잘 모르겠다.'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존은 공원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공원 한가운데에는 장우산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셜록이 서있었다.
"셜록?"
"별로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이런 날씨에 나간다는 것은 자네가 으레 생각할게 있을 때 마다 밖을 멍청하게 돌아다니는 습관이 도진 거겠지. 게다가 그럴 때마다 자네는 으레 이곳으로 오더라고."
"완벽하네. 근데 내가 항상 여길 온단 건 어떻게 알고있는거야? 미행이라도 했나보지?"
"뭐 비슷하지. 몇 주 전 이 부근에 일어났던 사건을 수사했을 때 자료를 수집할 명목으로 자네 위에 있는 CCTV의 영상을 본적이 있었는데 삼일에 한 번꼴로 자네가 이 공원벤치에 앉아있더군."
존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셜록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구먼.
"그러면.. 내가 생각할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여기를 찾아오는데, 자네는 왜 여기에 와있는거지?"
"그건.."
셜록이 난감하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렇다할 변명거리를 준비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깐.. 벤치가 젖어있으니 오늘은 공원벤치에서 앉아있을 수 없다는 걸 알려주려고 왔네."
"참 친절한 행동일세."
하지만 셜록의 구차한 변명에 하늘은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진 않았나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빗방울을 뿌리던 하늘이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존은 "비가 그쳤는데?"라고 장난스럽게 운을 떼며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은 작게 "젠장"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비가 그쳤어도 벤치는 여전히 젖어있기때문에 막무가내로 자신과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집안에 혼자 멍하니 남겨있는걸 참을 수 없어하는 눈치였다.
"벤치가 젖어있는 날이면 나는 보통 공원 건너편에 있는 저 카페에 들어가서 간단히 요깃거리를 하고 사색에 잠기고 하는데.."
"하고싶은말이 뭔가? 아직도 혼자서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안 따라 올 거야? 그리고 비가 그쳤으니깐 그 우산은 좀 접어둬 바보 같잖나."
몇 발자국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쀼루퉁하게 서있는 셜록이 보고는 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약간은 장난스럽게 그를 불렀다. 셜록의 얼굴이 조금은 펴지더니 쪼르르 존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제 같은 그런 달콤한 분위기는 살아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존은 한결 머리가 가벼워 짐을 느꼈다.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가게로 들어가니 라디오방송에서는 [오늘 오후는 잉글랜드 전반에 걸쳐 햇볕을 쬘 수 있는 운이 좋은 날이 될 것 같습니다. 낮 최고 기운은 19도로…….]라는 기상일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존은 문을 열고 셜록이 들어올 때까지 그를 기다렸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더니 쑥쓰러운듯이 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존 역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같이 미소를 지으며 셜록을 쳐다보았다.
뭐. 가끔씩은 좋은 일도 있겠지. 썩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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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The Thor/로키토르] HEY, BROTHER (for. 딤쿠님)
Ah, what if I'm far from home?
Oh, brother, I will hear call you.
아이는 작은 요람을 기억한다. 하늘의 낮과 밤이 한데 엉켜 산마루로 내려온 황혼이, 산턱의 가랑이를 벌리던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이 누워있던 작은 요람을 기억한다. 요람은 황금색으로 물든 대리석의 펜스 위쪽으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늦여름의 바람을 반겼다. 바람이 살며시 움직이던 요람과 아이의 코를 간질였다. 아이는 재채기를 한 순간을 기억한다. 바람에 실구름마냥 휘날리던 얇은 비단 커튼 뒤로 보이던 실루엣의 여인이 부르던 콧노래가 멈추던 그 순간을. 날이 저무는구나, 방으로 들어가자꾸나. 한 없이 자애로운 목소리를 아이는 잊은 적도, 잊을 일도 없다. 부드러운 육신이 칭얼거리는 어린 아이를 안고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 멀리서 개구진 소년의 커다란 목소리로 인해 아이는 작게 속삭이는 어미의 그 달콤한 속삭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린 아이들의 시야는 좁고 빛 부심이 심하다. 그래서 아이는 황혼의 하늘도 멀리서 뛰어오는 형제의 금빛머리도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반짝거리는 하나의 빛 무리에 불과했다. 아이의 칭얼거림이 점점 심해졌다. 반짝거리는 금빛머리의 형제는 어머니의 옷깃을 잡다가 작은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형제의 머리를 꼭 잡더니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동쪽하늘이 점차 먹색으로 변해가고 별들이 눈을 빛내던 때였다.
* * *
형제여, 나는 그대의 방종함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네.
로키는 토르의 정수리를 쳐다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동그란 정수리를 중심으로 형제의 사자갈기 마냥 날카롭고 풍성한 머리카락들이 모여들어 가마를 만들었다. 로키는 형제의 그 사소한 형상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가 최초로 기억하는 가장 어렸던 시절부터 그 언제 지금처럼 내 형제를 내려다 본 적이 있었는가? 그 순간, 흉곽 아래 감춰진 로키의 심장 중심에서부터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곧게 세워져 날카롭게 로키의 온 몸의 끝까지 달려들어 쿡쿡 찔러드는 그 것들은 요툰헤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투명하고 날카로운 고드름 같았다. 척추에 스며드는 서늘함도 비슷했다. 그 감정은 그간 오딘의 미명(美名)아래 그간 철저히 숨겨졌던 로키의 탄생의 근본이라 할 수 있었다. 줄기를 얼리고 아스가르드의 가지를 꺾으려던 서리거인들의 본능과 같은 정복욕이 로키의 오체에서 만개한 것이다. 그 순간 로키는 굳게 다짐했다. 세상아래 모든 빛나는 것들을 내 발 밑에 두겠다고. 로키는 형제에게 거짓의 작별을 고했다. 토르는 실망과 비통함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순순히 로키의 작별을 받아들였다. 형제의 축 쳐진 어깨가 좁아지고 머리카락이 반동에 약하게 흔들리며 푸른 눈 아래로 새벽의 이슬이 맺히는 모습을 로키는 놓치지 않았다. 약간의 거짓말과 정당한 권리로 나는 이제 저 가녀린 자의 주인이다. 로키의 입가에 휘어진 미소가 길게 걸렸다. 그 순간은 커다란 요람에 잠든 아버지나, 토르와 로키 모두를 부인한 채 근처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권력도 로키를 괴롭히지 못했다. 밤이 점차 짙어지고 비바람은 거셌다. 하늘에는 작은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Hey, brother
(For. 딤쿠)
written by, Cielo
1.
“저 아이는 왕위에 앉힐 수 없소, 프리가. 내 당연한 업보이고 가슴으로 품은 내 자식임에는 한 치의 부정도 없지만 벌써부터 아이의 행동에 교활함이 자라고 있소.”
프리가는 근심어린 눈으로 로키의 방까지 뻗어있는 어두운 복도를 흘깃 쳐다보았다. 기둥사이로 어스름히 달빛이 새어 들어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프리가는 그 것이 곧 빛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프리가의 정신은 어느새 그간의 기억들을 모두 헤집으며 몇 시간 전의 때로 향하는 중이었다. 해가 저물 무렵, 로키가 절뚝거리며 궁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로키를 본 모든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온 몸이 피투성이인 아이를 황급히 업어들었다. 당시 방 안에서 자수를 놓고 있던 프리가는 이 상황을 시녀의 말을 전해 듣고는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단숨에 로키에게 달려갔다. 로키는 잔뜩 겁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지만 용케도 울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눈에는 다급함과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프리가는 로키의 몸을 살핀 뒤 아이를 작게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둘의 몸이 빛나는 가 싶더니 로키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로키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프리가의 말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외쳤다.
“어머니, 토르가 아직 그 곳에 있어요.”
“어딜 말이니?”
“커다란 구덩이요. 오딘의 이름으로 맹세코, 저는 그런 곳인 줄은 몰랐어요.”
로키가 말을 한 뒤에도 사실 프리가는 그 커다란 구멍이 어딘 줄은 전혀 몰랐다. 오딘은 잠시 궁에 없었고, 아무도 로키가 말하는 구덩이를 알지 못했다. 결국 프리가는 병사 몇 명을 보내 로키의 안내를 받아 구덩이를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구덩이에 남겨졌던 토르도 크게 다치진 않았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두 왕자가 빠졌던 구덩이는 황궁을 벗어난 깊은 협곡에 드리운 그림자 안에 숨겨져 있었고, 이는 바나헤임으로 통하는 일종의 차원을 건너뛰는 통로였다는 것이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오딘은 크게 노하여 그 멀고 위험한 곳까지 가서 어떻게 통로를 찾았는지를 문책했지만 로키도 토르도 입을 굳게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오딘은 둘 중 누군가가 먼저 사실을 고하기 전 까지 둘 모두에게 방 밖으로의 외출을 금하고는 씩씩거리며 방에 돌아온 것이다. 프리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오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이 일이 로키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아직 진실을 모르잖아요.”
“진실은 말이오, 프리가, 토르는 평소 내 물음에 침묵을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이오. 아이가 영특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는 항상 진실했소. 로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온갖 장난과 거짓을 일삼았지. 로키가 통로를 찾은 것이 분명하오.”
프리가는 더 이상 입을 열어 로키를 변호할 수가 없었다. 로키는 내일 잘못을 추궁당하고 벌을 받을 것이다. 프리가는 다시 복도를 쳐다보았다. 복도 저 멀리로 새어 들어온 달빛 자락 일부가 어쩐지 일렁이는 듯 했다. 피곤해서 그래. 프리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사실, 마지막으로 프리가가 본 일렁임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시선을 두었던 그 복도 끝자락은 확실히 육안으로는 텅 빈 복도일 뿐이었지만 벽에 건 횃불은 거세게 일렁였고 작은 발소리가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발소리는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위로 빳빳이 솟아있던 잔디가 급히 눌렸다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세우곤 했다. 발소리는 마구간 문 앞에서야 멈추었다. 횃불이 활활 타오르는 문 앞에는 연철 투구를 쓴 거구의 마구간지기가 의자에 앉아 술병을 껴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곧이어 이 마구간지기는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넘어진다. 마구간을 뛰쳐나온 새하얀 말이 하얗게 빛나는 잔상만 남긴 채 저 멀리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을 쫓으려 급히 마구간으로 뛰어 들어간 마구간지기는 새파랗게 질려 “오딘이시여...”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주저앉았다. 마구간에 말들 중 오딘의 애마, 슬레이프니르를 따라잡을 수 있는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신성한 말이 잠들어 있어야 할 우리의 문은 활짝 열린 채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마구간지기는 간신히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켜 경종이 있는 곳 까지 걸어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어둡던 궁전이 늘어나는 횃불들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주 멀리서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경종소리를 듣자마자 프리가가 달려간 곳은 로키의 침상이었다. 볼록 튀어나온 이불을 살짝 걷어낸 프리가가 곤히 잠든 로키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도 잠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문을 외우며 손을 흔들자 조각이 나 흩어지는 로키의 잔상에 프리가는 탄식을 내질렀다.
“어머니.”
프리가는 뒤를 돌아보았다. 잠옷을 입은 토르가 불안한 눈빛으로 프리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프리가는 토르의 두 어깨를 붙잡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토르야, 네 형제가 말고삐를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니?”
토르는 눈을 내리깔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프리가가 몇 가지를 더 물어봤지만 토르는 같은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전 아무것도 몰라요.”
오딘의 슬레이프니르를 훔쳐 달아난 게 로키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딘은 무척 화가 난 듯 보였으나 토르를 질책하거나 로키를 찾으려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로키에 대해 더 이상의 나쁜 소문이 돌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프리가는 로키의 잔상을 만들었다. 토르는 동그란 눈으로 그 모든 소란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하면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식이었다. 프리가는 토르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이번에는 토르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진실은 말이오,내 물음에 침묵을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이오.’ 프리가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토르를 쳐다보며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 서로를 위해 어미에게 거짓말을 할 정도로 너희가 자랐구나. 그러나 단지 나쁘게만 생각해선 안 되겠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일 테니. 프리가는 그날 밤이 지나 여명이 밝아올 때 토르가 발소리를 죽이고 방을 나가는 모습을 밤새 만들어 둔 로키의 잔상을 통해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토르를 뒤 쫓지도, 오딘을 깨우지도 않았다. 어쩐지 이번에는 토르가 로키를 데리고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2.
태어난 이래로 황궁 밖을 나선 적 없던 토르가 궁 밖을 나서기 시작한 건 치국(治國)을 위한 오딘의 가르침으로 인한 것도, 어머니와의 단란한 소풍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토르의 손을 잡고 바깥의 달콤함을 유혹한 것은 토르보다도 작고 가는 로키의 드센 팔이었다. 어린 두 왕자의 비밀은 이 때 처음 생겨났다. 로키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마법에 대한 재능이 특출 났는데, 둘은 수업이나 중요한 일이 없어 한가한 날에는 로키가 둘의 잔상을 만들어 놓고는 감시의 눈을 피해 폭포줄기 뒤에 가려진 나선형의 돌계단을 타고 궁을 벗어나곤 했다. 두 왕자는 궁의 정원에서 볼 수 없는 푸른 숲의 높고 어둑한 위압감이나, 서민들의 단출한 생활과, 위대한 아스가르드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광장의 노인의 말재간을 아주 좋아했다. 특히나 로키는, 왕궁의 답답하고 단조로운 생활보다 바깥세상을 탐험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무척이나 강했다. 그러한 집착은 단순한 어린아이의 고집과 다를 게 없었다. 단지 다른 또래들 보다 좀 더 영악한 것이 그간 로키가 수 백 번이나 황궁을 벗어났으면서도 토르를 제외한 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였다. 토르는 로키가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는 날에도 굳게 입을 다물고 평소보다 행동을 조심히 했다. 그렇게만 하면 다시 돌아온 로키가 신기하거나 재미있는 소식을 가지고 오거나, 좋은 장소를 찾아 와서는 다른 날에 토르를 데리고 가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밤늦게 돌아온 로키가 평소보다도 흥분한 얼굴로 토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성 뒤에 있는 숲 안쪽 그늘이 드리운 협곡에 굉장히 신기한 구멍이 있어.”
“엄청나?”
“엄청!”
토르는 그날 밤 새로운 구멍에 대한 생각으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르가 그 구멍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아스가르드의 용맹했던 전사들의 혼을 기리기 위한 성대한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도무지 어린 왕자들을 돌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형제는 평소보다도 수월하게 궁을 빠져나가 숲으로 들어섰다. 곧은 형태로 높게 솟아오른 전나무들은 빼곡히 열을 세워 아스가르드의 지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여주는 태양을 가리었고, 그 덕에 숲은 깊숙이 들어 갈수록 고요와 어둠만이 짙어졌다. 로키는 손 위에 빛을 내뿜으며 반짝이는 수정체를 들고 다른 손으로 토르의 손을 잡고 앞장 서 걸었다. 간신히 발 앞의 돌부리를 피할 정도로 어둑한 시야에서 위태하게 걷던 토르의 귓가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소리는 점점 거세지다가 기어코 토르의 코앞에서 보랏빛 물거품을 튀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것은 좁은 폭포였다. 낮에는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밤에는 달빛 별빛을 머금어서 하늘의 오로라를 담아두곤 흐르는 황궁의 거대한 폭포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잊혀 숲속에 갇힌 이 폭포는 날카롭게 성을 내며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로키는 그 괴이한 광경에 넋을 놓은 형제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이제 다 왔어.”
둘은 절벽의 비탈진 경사를 타고 내려가 커다란 동굴의 입구를 찾아내고 작게 환호했다. 토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동굴
에 들어서곤 탄성을 내질렀다. 동굴은 숲길보다 밝았고 동굴 안을 뒤덮은 자수정들이 작은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토르는 자신이 마치 밤하늘 한 가운데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키는 토르의 옆으로 다가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장미 덤불 숲 에서도 비슷한 동굴을 찾았어. 그런데 여기보다 예쁘지는 않더라고.”
“정말 예쁘다.”
토르는 입을 벌리며 동굴을 쳐다보았다. 동굴의 저 너머에서 보라색 빛들이 토르를 끌어당기며 아이를 유혹했다. 토르는 자기도 모르게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로키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형, 괜찮아?”
“난 괜찮아.”
“너무 깊게 들어 가본 적은 없는데, 안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어둠속에서 강렬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자수정들의 빛들은 토르에게 달리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 다가오려무나, 아가. 그 순간 깜빡거리던 빛들이 토르의 온 몸을 잡아당기며 그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빛들은 깜빡이지 않았다. 그들은 토르를 잡아끌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빛의 색은 더욱 다채롭게 변해 푸른빛, 붉은빛을 뿜어내며 토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고 잔상들이 토르의 뒤로 길게 꼬리를 남겼다. 토르! 뒤에서 로키가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너무 늦어 버렸다. 빛 무리들은 거칠게 두 아이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고 간신히 토르의 팔을 잡은 로키도 하염없이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토르는 마지막 힘을 다해 로키를 바깥쪽으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어른들을 불러 와, 로키!”
땅바닥에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와 빛들이 바람처럼 고함지르는 소리가 뒤엉키면서 오색의 빛 무리들이 이제는 하나의 단단한 구체로 뭉쳐 아가리를 벌렸다. 토르는 그대로 빛에게 먹혀 정신을 잃었다.
3.
바다가 잔잔하게 흘렀다. 황궁의 폭포에서 시작된 황금빛 물줄기들은 아스가르드 도시 밑을 지나 흘러 내려와 수십 갈래로 나눠지고 마지막에는 결국 아스가르드를 빙 두르는 바다가 되었다. 바다 끝에는 우주의 은하수로 흘러 들어가는 폭포가 있었다. 남쪽은 바다는 유난히 수심이 잔잔했고, 등선이 낮고 햇볕이 잘 드는 산들이 많았다. 토르가 기억하기로는 남쪽에 있는 세 개의 산 중 장미덤불이 있는 산은 딱 하나였다. 한 나절을 꼬박 걸어 지칠 대로 지친 토르는 잔뜩 우거진 장미덤불을 쳐다보며 제발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기를 바랐다. 토르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장미덤불을 제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커다란 가시에 팔이나 다리를 긁히면 토르는 작은 신음을 흘리거나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안으로 들어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덤불까지 모두 제친 토르는 불안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자로 곧게 뻗어있는 매끈한 절벽에 작은 동굴이 보였다. 토르는 너털너털 동굴로 걸음을 옮기며 힘없이 로키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내 동생아. 동굴 안은 지난번과 다르게 사람의 마음을 뺏는 빛깔의 광물이나 이상한 속삭임도 없이 어두웠고 조용했다. 지극히 평범한 동굴이라는 사실은 힘겹게 걸음을 한 토르의 몸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토르의 머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모래에 긁히는 팔 다리가 몹시 쓰라렸다. 토르의 눈에 눈물이 맺힌 순간이었다. 동굴 안 쪽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토르는 눈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로키?”
토르는 작은 목소리로 로키를 불렀다.
“로키, 너야?”
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토르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토르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손에 쏙 들어오는 돌이 토르의 손가락을 스치자 토르는 그 돌을 꾹 잡으며 아까보다도 더욱 조심한 목소리로 빛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지? 로키? 아니면...”
빛은 더욱 빨리 토르에게 다가왔다. 미묘하게 떨리는 색을 띄고 있었다. 아니, 빛을 잡고 있는 손이 떨고 있었다. 겁에 질린 로키의 얼굴이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르?”
토르는 그제야 안도하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손에 꽉 쥐고 있던 돌이 바닥을 살짝 패는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로키는 잠시 경계를 하는 지 토르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누워있는 형제의 옆에 앉았다.
“여긴 왜 왔어?”
“널 데리러 왔지.”
“아버지가 날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로키는 손에 들고 있는 수정구로 토르의 몸을 스윽 살펴보았다. 붉은 망토는 흙투성이가 되어 잔뜩 헤져있었고 팔 다리엔 생채기가 가득했다. 로키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형을 죽일 뻔했잖아.”
“고의가 아니었잖아.”
“만약... 내가 고의라고 한다면?”
토르는 로키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을 깜빡였다. 숨을 골랐다. 로키는 그 순간동안 토르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윽고 토르는 동굴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내 형제잖아, 난 널 믿어.”
동굴 안쪽에서 약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저 안은 또 어디로 향하는 곳이기에 저리도 조용히 고함치고 있을까? 로키는 바람소리에 관심이 없는 듯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보아라, 아우야 너는 지금도 지친 나를 해하려 하지 않잖아. 토르는 작게 미소 지었다.
“로키, 우리 모두 네가 장난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내 동생이 아닌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어?”
"내가 더 심한 장난을 치면? 그 때는 토르, 형이 날 싫어하게 되면?“
“그럴 리가.”
토르는 일어나 로키의 손을 꾹 잡았다. 흙투성이로 한껏 거칠어진 손이지만 무척이나 따듯했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멀리 사라져 버리면?”
“난 그래도 네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거야. 그리고 언제라도 널 찾으러 갈 거야, 오늘처럼.”
로키가 무릎사이로 슬며시 얼굴을 내밀며 토르를 쳐다보았다. 녹색 안광이 순간 번뜩였다.
“그러면 토르, 약속해줘. 형만은 마지막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그러면 나는-”
토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로키는 그 형제의 환한 얼굴을 영영 기억하기로 다짐했다. 그 얼굴 뒤로 반짝거리는 금색의 빛 역시도.
4.
형제여 그대가 나에게 말했지. 마지막까지 너는 내 편이 되어줄 거라고.
로키의 눈앞에 어둠이 도래했다.
지금까지 어둠은 단 한 번도 다 자란 로키를 괴롭힐 수 없었는데 형제의 머리처럼, 혹은 아버지의 머리처럼, 아니면 어머니의 머리처럼 황금빛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밟으며 똑같은 색으로 인생을 물들일 때, 로키는 제 검은 머리를 밟으며 그 인생을 검게 칠해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로키는 그 어린 시절을 영영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그의 모든 악행들을 그런 식으로 변호했다. 그 날의 모든 것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그 날의 동굴은 해임달이 둘을 찾을 때 까지 어떠한 빛도 없던 칠흑 그 자체였다. 황궁의 빛깔들은 그 날을 너무도 쉽게 잊도록 로키를 끊임없이 종용하면 로키는 제 스스로 먹을 칠하여 색을 바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형제는 그러지 않았지.토르, 오딘의 아들, 아스가르드의 왕이 될 자, 나의 형제여. 로키는 몸을 웅크리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처음 약속을 잊은 자는 누구였는가? 그 날, 로키는 다짐했다. 내 형제가 끝까지 나를 편들어만 준다면 나는 황금의 왕좌를 넘보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토르는 자라면서 점점 방종해졌고 거만함으로 영혼을 채우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자 소매를 잡아당기는 동생의 손을 점차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를 내버려두고선 다른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날이 더욱 많아졌다. 로키는 점점 그 앞에서 말하는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토르는 더 이상 로키에게 괜찮냐는 말을 물어보지 않았다. 형제여 그대는 정녕 그 날을 잊었나? 로키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그 날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장미 덤불에 숨겨졌던 작은 동굴 속에 숨어 어둠속에서 벌벌 떨고 있던 그 날이 재연이라도 되는 것 마냥 로키는 어둠이 두려웠다. 하지만 로키는 오히려 크게 웃었다. 어둠이 더 이상 자신의 웃음을 먹어내지 못할 때 까지 소리를 높여 웃다가 돌연 형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웃음이 고함으로, 고함이 광기로, 광기가 흐느낌으로 탈피할 때 까지 토르를 부르짖음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로키의 부르짖음이 뚝 멈추었다. 한동안 로키는 송장처럼 숨을 멈추고 어둠에 그대로 몸을 웅크린 채 미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키는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것을 시작으로 몸을 작게 경련하듯 움직였다. 경련이 잦아들자 로키는 어둠속에서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고 미소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까의 광조(狂躁)와는 다르게 너무도 침착했다. 그래 좋다 이거야. 로키는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나에겐 형제가 존재한 적이 없었지.”
이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둠 사이로 죽어가는 별들이 팽창하는 모습이 보였다. 별들이 밝게 타오르는 별들의 무덤 사이로 로키는 정확하게 아스가르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스가르드의 정당한 왕이야.”
로키의 눈에 광채가 번뜩였다. 그 눈 안에는 모든 빛깔 있는 별들이 서로 엉켜 몸을 태워 공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엉킨 별들의 무리들은 아가리를 크게 벌려 기어코 토르를 집어 삼켜버렸다. 이것은 명백한 고의였다.
그의 눈에서부터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Fin
글
[The hobbit/킬리필리] 형제 괴롭히기 (Bullying the Angel)
"둘이 참 사이가 좋아 보여요."
"어떤 친구들 말인가, 골목쟁이씨?"
"저 두 형제 말예요."
발린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개울가를 가리키는 빌보의 시선을 쫓았다. 미풍에 코가 간지러 가볍게 재채기를 한 발린의 찌푸린 눈에 서서히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뛰노는 젊은 형제가 보인다. 발린은 아직도 천진난만한 젊은 친구들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암, 그렇고말고.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는 석양빛이 잘 쬐이는 바위에 자리를 잡은 소린이 무기손질을 하면서도 간간히 고개를 들어 두 형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굴곡 많은 여정 길에 찾아온 간만의 평화로다. 그러다 문득, 굴곡이란 생각에 발린에게 옛 추억이 떠올랐다.
"항상 저리 우애가 깊진 않았다네."
"오, 정말요? 상상이 잘 안 가는데요?"
"아마 자네가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시절만큼 오래된 일이긴 하지."
발린은 그렇게 말하며 빌보에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빌보는 크게 흥미가 동했는지 벌써 편하게 다리를 펴고 담뱃대에 담뱃잎을 채워 넣고 있었다. 발린도 필요하실 것 같은데요- 라고 너스레를 떨며 담뱃잎이 채워진 쌈지를 내미는 걸 보니 잠시의 흥미로 끝낼 생각은 없어보였다. 이 정도면 말값으론 충분하지. 발린은 내민 쌈지로 속이 빈 담뱃대를 채워 넣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척에 있던 소린마저도 무기를 손질하는 손이 느려지고, 그 옆에서 담뱃대를 물고 있던 간달프도 발린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모든 옛 이야기의 시작의 서두는 항상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니까 먼 옛날에…….
천사 괴롭히기
Bullying the Angel
for. 숲운님
***
"저 나이때는 저럴 때도 있는 법이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디스."
"드왈린, 자기 자식에게 어찌 걱정이 안 가는 순간이 있겠어요. 그리도 사이좋던 녀석들이 저런지도 벌써 한 달이에요."
그러고 보니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마을 어귀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못 본지 제법 오래됐다 했다. 오찬 상을 치우는 디스를 위해 그릇을 한 곳으로 가지런히 모으던 드왈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마시는 발린을 보며 자신들의 유년시절을 생각했다. 제법 나이차이가 나는지라 크게 다투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싸우거나 서로 감정이 상했던 기간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오랫동안 말을 안 했던 적이 며칠이더라?
"확실히 한 달은 좀 심하다 생각이 드네요. 제가 보기엔 큰 문제 같은데요, 소린."
"그렇죠, 발린? 거봐. 오빠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니깐."
부엌 선반에서 다과를 꺼내던 소린이 작게 한 숨을 내쉬며 형제 중작은 놈이 올라간 계단과 큰 놈이 나간 현관을 번갈아 쳐다보다 작게 신음을 흘렸다. 흠…….
그러니까, 마을에서 우애라면 둘째가 서럽던 이 형제가 생판 남을 대하는 것보다도 서로를 냉랭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이 어연 한 달이 지났다. 형제의 아미 되는 디스의 설명을 듣자하니 처음 시비를 턴건 킬리라는 동생이었는데 사사건건 필리의 말에 꼬투리를 잡거나 필리가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붙임성 좋던 녀석이 갑자기 왜 그런 거지?"
비스킷을 먹던 발린이 궁금한 듯 물었다. 모인 사람 중 가장 노대한 발린의 말인즉슨 킬리가 일방적으로 좋아 마다않던 형제에게 작경할 녀석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분명 필리에게도 킬리의 행동에 원인을 제공했을 터, 그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우선이라 하자 디스는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다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한, 필리가 킬리에게 못되게 군적은 한 번도 없는걸요."
"디스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일이 일어났겠죠. 이제 저 나이가 되면 자식들은 부모의 품보다는 넓은 밖을 더 사랑하는 법이니까요. 다만 필리가 집에 돌아올 때 넌지시 물어보는 것이 어른이 할 일이라 봅니다."
발린의 말에 디스는 불안한 듯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식사만 마치고는 쌩하니 제 방에 올라가 침대에 누워있을 작은 아들을 생각하니 절로 한 숨이 나왔다. 사내자식들 생각을 여인인 내가 어찌 알까? 소린은 그냥 말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하니 디스의 속은 더더욱 타들어갔다. 이럴 땐 소린보다 덜 과묵한 작은 오빠가 있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디스는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만약에라도 둘이 화해를 못해서 저리 어그러지다 한 명이 큰 사고라도 난다면 어찌하겠냐며 속으로 한탄하는 디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그제야 가만히 있던 소린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필리가 오면 내가 물어볼 테니 너무 걱정은 말렴."
발린과 드왈린은 두 남매를 바라보며 조용히 티타임을 즐겼다. 아직 젊은 공주님이 눈물이 많은 사실이나, 참나무방패께서 여동생에게 하염없이 약하단 사실은 둘에게 새로울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필리는 언덕 끝에 무릎을 안고 앉아 다른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갓 서른이 된 필리는 이제 거의 어른의 태가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모루에 쇠를 두들기는 것 보다는 친구들과 뛰어 놀거나 공놀이를 하는 게 더 즐거웠다. 그러다보니 넓은 아량으로 동생을 이해해보고자 노력을 해봐도 억울하고 화가 나는 감정을 억누르기란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생인 킬리가 킬리를 괴롭히기도 어연 한 달, 어젯밤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은 킬리가 베고 자는 베개의 천을 죄다 찢어놓았다. 갈수록 괴롭힘의 수위가 지나치다. 침대위에 산란한 베개속의 깃털을 보며 필리는 부득 이를 갈았다. 이 모든 괴롭힘이 무엇보다 필리를 분노케 하는 것은 도통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킬리가 자기를 괴롭히는 이유를.
처음에는 무언가 자기에게 섭섭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볼 때마다 날선 어투로 시비를 털기 시작하자 참아주는 것에 한계가 있던 필리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뭐가 불만인지 얘기하라는 말에는 말대꾸도 하지 않자 어느덧 필리 역시 킬리에게 화를 내거나 때리기도 했다. 아직도 둘의 눈에 맺힌 멍자국이 옅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한 달, 필리는 영문도 모른 채 지금까지 그렇게 막역했던 킬리와는 둘도 없는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어른들의 앞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수도,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찰 수도 없게 만들 정도로 필리를 화나게 했다.
물론 과거에도 몇 번이나 다투거나 주먹다짐을 한 적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앙금을 남기거나 오랫동안 토라진 적은 지금까진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필리에겐 불만이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을 한 거지? 아니, 이제 와서는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킬리의 괴롭힘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서로 계속 다투게 된다면…….
"필리?"
"아악!!"
필리가 펄쩍 뛰어오르다 하마터면 뒤에 있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때릴 뻔했다.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이 어린 난쟁이 아가씨는 가볍게 뒤로 발을 빼내며 입에 손을 가져다대곤 무어가 재미있는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사람이 오는 것도 몰라? 네 앞에서 걸어왔는데 눈치도 못 채더라."
"아니, 그게-미안."
필리는 더듬거리며 황급히 말을 마쳤다. 멀리 철산에서 친척을 만나러 가족끼리 먼 길을 온 이둔이라는 이 작은 아가씨는 도착한 첫 날,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필리의 시선을 훔쳐갔다. 킬리는 키가 너무 작다느니, 머리가 너무 곱슬이라느니하며 필리 앞에서 악담을 했지만 필리가 보기엔 그의 형제가 말한 불평은 결점보다는 그녀를 한층 더 귀엽게 만드는 장점 같았다. 그녀의 가족은 당초 청색산맥에서 백 일을 보내고 철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약조한 백 일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이는 킬리의 괴롭힘만큼이나 필리를 가슴 아프게 했다. 필리는 발그스레한 그녀의 통통한 볼을 좋아했는데 특히 웃을 때 그 동그란 볼이 눈가 바로 밑으로까지 들어 올려지는 게 무척이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나 좋아하는 얼굴인데 막상 바라보면 볼이 화끈해지면서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필리의 앞에서 속 편히 웃는 그 얼굴을 보기가 매우 수삽스러워 필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또 동생 때문이야?"
"그게-음-맞아."
필리는 뒷목을 매만지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둔은 팔짱을 끼고 기가 죽은 필리를 쳐다보다 필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사뿐히 앉았다.
"뭐가 화났는지 얘기도 안 해줘?"
"응."
"흐음."
필리는 옆에서 이둔의 숨 고르는 소리를 들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어쩐지 복잡한 마음이 좀 더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필리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슬금슬금 이둔을 쳐다보았다. 필리와 똑 닮은 노란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푸른 빛깔을 좋아하는 그녀에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이야. 필리는 저 머리에 푸른빛의 커다란 보석을 박은 머리핀을 꽂아주면 금상첨화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킬리와 처음 생경하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필리가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만들기 시작한 장신구가 바로 그녀에게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사실 이둔을 생각하며 만든 게 맞기도 했다. 일주일 후에 철산으로 돌아갈 이둔에게 자신과 청색산맥을 잊지 말아달라는 상징이며 필리의 완곡한 고백이기도 한 머리핀은 지금까지 필리가 사람들에게 배워가며 만들었던 그 어떤 장신구보다도 열과 성을 다한 작품이었고, 이제는 마무리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집에 잘 있겠지? 필리는 순간 킬리의 음흉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억지로 생각을 떨쳐내었다. 그 순간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이둔이 입을 열었다.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닐까?"
"뭐?"
필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이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킬리가 널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고. 철산에 남아있는 우리 언니 이바 얘기 해주지 않았어? 형부가 어릴 적에 그렇게나 언니를 못살게 굴었는데 어른이 되자마자 고백해서 결혼했잖아. 난 아직 형부가 살짝 얄밉긴 한데, 우리언니가 더 이해가 안 간다니깐? 어릴 적엔 그리도 울고불고 싫어하더만, 어디가 좋아서 덥석 결혼이나 해버리고 말이야. 임신까지 해버려선 여기엔 오지도 못하고."
'아주 잘 알지. 그녀의 산달에 맞추려고 백 일만 있다 돌아가는 거잖아.'
필리는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대답했다. 이둔은 필리의 뚱한 표정이 그의 동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확신해선 좀 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내 요지는, 그러니깐 네 동생도 살짝 모난 성질이 있잖니? 한창 삐딱할 나이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좋아한다고 말을 하거나 삽삽하게 굴기 보다는 너를 괴롭히는 걸 수도 있어."
앞전에 필리가 회상했던 대로 킬리는 이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대할 때 마다 매번 퉁명스럽게 행동했고, 당연히 이둔도 킬리를 좋게만 생각하진 않았다. 필리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킬리를 낮잡아보는 이둔의 말에 살짝 난색을 표하면서도 나무라거나 항변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필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진 않을 거야. 그렇게 굴지 않아도 평소에 우린 서로를 매우 아끼고 좋아했거든."
"흐음, 그래?"
필리는 자신을 골똘히 쳐다보는 이둔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얼굴이 달아올라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이둔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필리는 숫기 없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창피해졌다. 이렇게 숙맥이니 킬리가 매번마다 괴롭히는 거 아닐까? 필리가 그렇게 혼자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이둔은 필리의 얼굴에서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노란머리카락이 산들산들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닷새 뒤면 저 머리카락과도 안녕이구나.
"사흘 뒤에 숙부의 집에서 송별파티를 할건데, 당연히 올 거지?"
"아……."
필리가 탄성을 내질렀다. 기어이 올게 왔구나! 필리는 참담한 속내를 최대한 숨기려고 입 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가야지."
"그래, 네 동생이랑도 화해해서 같이 왔으면 좋겠다. 요 근래 녀석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더니 그리워지려고 해."
필리는 방금 전의 억지웃음보다는 좀 더 편한 미소를 지었다. 이둔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진심이야. 둘이 예전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는 모습을 보고 떠나고 싶어."
"고마워."
필리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둔은 힘없이 쳐진 필리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필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가야돼. 숙모랑 저녁 장을 보러가기로 했거든. 해 떨어질 때 까지 궁상맞게 여기 앉아있지만 말고 친구들이랑 뛰어놀기라도 해봐."
"알았어, 잘 가."
"안녕, 필리."
이둔은 마지막으로 필리의 등을 힘주어 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리는 아릿한 등짝을 어루만지며 이둔의 파란 드레스가 나풀거리며 멀어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파란색 나비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겠지. 필리는 나비모양으로 만들고 있는 머리핀을 생각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세 사라졌다. 또다시 싸늘한 킬리의 얼굴이 필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필리는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화해하고 싶은데…….
* * *
"저녁이나 드십시다."
쇠붙이가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발린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간만에 고기가 들어간 스프라는 나름의 희소식을 들려줄 생각에 잔뜩 들떠있던 보푸르는 사람들의 화가 난 표정에 기가 죽어 배식을 받아가라며 황급히 말꼬리를 흐리며 힘없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도 물장구를 치던 젊은 형제는 언제 옷을 추슬러 입었는지 식사소리에 부리나케 발린의 일행을 지나쳐 커다란 솥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우리도 우선 배를 채우는 게 더 좋을 것 같네. 마침 담배도 다 피운 것 같으니 말일세."
"그러게요. 사실 저녁 먹을 시간이 조금 지난 것 같아요."
"호빗의 배꼽시계는 놀랍도록 정확하지. 그 시계를 잠시나마 늦춘 자네의 말솜씨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을 걸세, 발린."
간달프의 말에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저 멀리 솥 앞에서 스프를 그릇에 나눠담던 봄부르와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형제만이 무어가 그리 즐거워 저리 웃는지가 궁금해서 고개를 쭉 빼며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기분이 좋았다. 아니 사실은 아직도 좋진 않았다. 기분이 좋았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이보다 더 가벼워야 했다. 처음 집을 나설 때 보다는 좋아졌다는 편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필리는 집에 가까이 갈수록 커져가는 킬리의 심술궂은 얼굴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해야만 했다. 필리는 이둔의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은 파란 나비가 다시 활기차게 날갯짓을 하며 자신의 집으로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자신의 처지가 우선해지는 것 같았다. 필리는 상상속의 파란 나비를 쫓아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면 킬리는 생각하지 말자. 머리핀에만 집중하는 거야. 그리고 머리핀을 다 만들면 그 때는 꼭 킬리와 제대로 얘기를 해보자. 정말로 잘 되면 이둔의 송별잔치에 함께 갈 수 있을 거야.'
필리의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졌다. 마음도 딱 그만치만 가벼워졌으면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러지 않았나?
아프니깐 청춘이라고.
"필리야, 그러니까 이건 킬리가 부주의로 보지 못해서 실수로……."
부주의는 무슨! 필리는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식탁 한가운데에 머리핀이 처참한 몰골로 반 토막이 난 채 놓여 있었다. 조금만 손을 보면 완성될 작품이었는데. 필리는 허망한 표정으로 망가진 머리핀을 쳐다보았다. 디스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라 손가락을 꼬아가며 소린과 필리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소린은 근엄한 표정으로 필리의 이름을 불렀다.
"필리."
"킬리 어디 있어요?"
"내 말 들어라. 속상한건 알겠다만 크게 소란을 피우면-"
"위에 있구나."
필리는 걱정스럽게 위를 쳐다보는 디스를 보며 킬리가 위층에 있다는 걸 짐작했다. 처음의 망연자실하게 축 늘어진 양 팔에서 격노가 일었는지 뜨거운 힘이 솟아났고, 필리는 주먹을 꽉 쥐고는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필리, 킬리의 부주의함으론 이미 내가 꾸지람을 하였으니, 네가 더 다그칠 일은 없다!"
"망가진 물건은 내건데 왜 내가 화를 내면 안돼요?"
필리는 결국 소린에게 소리를 지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소린이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디스가 다급하게 필리를 쫓아가다 다시 돌아와 소린의 옷깃을 잡으며 흔들었다. 소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기다려보자.
필리는 킬리의 방문을 있는 힘껏 차댔다. 방 안에서 침구가 부스럭 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있지 않아 문의 걸쇠가 풀렸다. 필리는 그대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 밀린 킬리가 잠시 비틀거리더니 똑바로 서서 필리를 흘겨보았다.
"왜 그랬어?"
"뭐가?"
"머리핀. 왜 망가트렸어?"
"그게 그렇게 대단해?"
필리는 당장이라도 킬리의 얼굴을 냅다 주먹으로 한 방 갈겨주고 싶었다. 필리는 애써 손톱으로 살을 누르며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킬리는 그런 필리를 냉조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직접 꽂고 다닐 건 아니고, 선물하려 만들었나봐. 내가 망가트려서 어쩌냐?"
"이둔한테 줄 거였어. 너도 알잖아."
아, 그 악성 곱슬계집? 킬리가 짐짓 놀라는 투로 말하며 필리를 조롱했다.
"곧 떠난다며? 근데 이건 형을 위한 걸 수도 있어. 그런 형편없는걸 선물로 주면 걘 다시 널 보려고 하지 않을-"
결국 필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얼굴을 맞은 킬리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푸른 멍이 채 빠지지도 않은 눈가 바로 아래를 맞자 킬리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다고 킬리가 울거나 계속해서 소리를 내지르는 녀석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이미 킬리는 필리와 체격이 엇비슷해졌고 마을에서 꽤나 악동이었기에 킬리는 자신의 비명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계단을 뛰쳐올라오는 소리를 듣고도 그대로 달려오는 필리를 발로 걸어 넘어뜨리고는 위로 올라탔다. 그러다보니 이미 어른들이 올라왔을 땐 둘이 우위를 점한다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에게 수도 없이 주먹질을 하고 있었고 소린이 간신히 떼어내고도 서로에게 씩씩거리며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필리는 한참을 씩씩거리다 간신히 킬리에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너, 내가 형제라서 싫으냐?"
킬리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러나 어떠한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난 네가 내 동생인 게 진짜 싫은데."
"필리!"
소린과 디스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하지만 필리는 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난 너 따위 동생이라고도 생각 안 해!"
필리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한참을 더 씩씩거리다 강한 충격과 함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앞에는 화가 잔뜩 난 디스가 다시 한 번 필리를 때릴 생각으로 무섭게 서있었다. 형제를 사이에 두고 소린이 간신히 그들의 아미를 말리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필리는 남매가 옥신각신하는 모습 너머로 킬리를 쳐다보았다. 킬리는 더 이상 필리에게 화가 나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킬리의 표정은……. 필리가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그 아차, 하는 찰나에 킬리는 등을 돌려 방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방에 남은 세 사람이 단숨에 조용히 킬리가 뛰쳐나간 문 너머를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갑자기 정신을 차린 필리가 황급히 킬리를 쫓아 나섰다. 이제는 형제가 싸우던 방 안에 둘만 남은 소린과 디스가 덩그러니 서서 문 밖을 쳐다보다 디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린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 오빠 말을 믿으면 멍청이야."
* * *
형제가 아니었으면 했다.
킬리는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방금 전까지도 진심으로 필리와 형제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 발단은 너무나 사소한 거였지만, 킬리의 속에 내재되어있는 감정의 급류가 사소한 것이 아닌 것이 지금까지의 킬리의 심보를 만들었으리라. 그래서 킬리는 자신의 형제에게도 내가 저의 형제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담? 킬리는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방법이 있는지를 곰곰이 고민할 정도로 성숙한 나이가 아니었고,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영리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동생이라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괴롭히면 되겠지.
그 때부터 킬리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킬리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형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 가장 나쁜 말을 하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로 형연할 수 없는, 괴롭힘에서 나오는 묘한 쾌감이라는 게 킬리의 약한 마음을 살살 꾀어내어 그만두게 두질 않았다. 훗날에 킬리가 이 날의 이유를 생각하자면 그 모든 게 질투에서 생겨난 것이었음을 쉽게 시인하겠지만, 이때의 킬리는 아직 질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를 때였다. 어쨌든 그렇게 킬리의 괴롭힘은 언덕에서 공을 굴리듯 점점 가속도가 붙어 그 정도가 심해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필리도 킬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시하기 시작했다. 무시를 못 하면 주먹이 나갔다. 킬리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무시를 하는 것 보다는 맞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을 쳐다보는 필리의 표정에 적개심이 생겨나자 킬리는 내심 기뻐했다. 어쩌면 정말로 필리가 날 동생이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거야!, 하고 생각을 할 때에는 가슴이 세게 쿵쾅거렸다. 진심으로 킬리는 그 정도로 필리가 형제가 아니었으면 했다.
그리고 결국 킬리가 원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사실 킬리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필리와 한바탕 크게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날 밤에 필리의 베갯잇을 전부 찢어버렸으니, 요즘 필리의 성정으로는 킬리를 본 순간 드잡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디스의 꾸준한 호들갑에 이른 아침부터 형제의 상태를 보겠다고 발린과 드왈린이 방문을 한데다가 며칠 동안 마을을 떠나있던 소린까지 돌아오는 바람에 둘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욕설 한 번 오가지도 못한 채 오전을 보내야 했다. 결국 화를 참을 수 없던 필리가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밖으로 휙 나가버렸는데 킬리는 이층 창문에서 씩씩거리며 뛰어가는 필리를 바라보며 적당히 시차를 두고 따라 나가 고투 질이나 해야겠다며 이번엔 어떤 거리로 필리를 화나게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쇳가루라도 끼얹어볼까? 킬리는 쇳가루의 유해성을 생각하며 다락에 만들어 놓은 작은 공방으로 올라갔다. 필리에게 시비걸기 시작한 이후에는 필리가 살다시피 하는 바람에 킬리는 여태껏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탁자위에 있는 파란 큐빅이 알알이 박힌 나비모양의 머리핀을 본 킬리는 필리의 실력에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필리는 항상 손재주가 좋았지. 킬리는 남몰래 필리의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을 하며 숨죽여 웃다가 다시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데 누굴 주려고 머리핀을 만드는 거지?'
자신들의 어머니, 디스는 난쟁이 치고는 소박한 편이었기 때문에 머리에 커다란 보석 핀을 올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인 필리가 자기가 사용하려고 만든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킬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쳤다.
"이둔."
킬리는 입을 비쭉 내밀고는 구석 모루위에 놓인 망치를 집어 들었다. 맨망스런 계집아이! 킬리는 그 애가 온 순간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매도 사납고 필리에게 친한 척 막 대하는 꼴이 영 아니었는데, 그 계집한테 홀려 헬렐레 하는 필리의 표정을 보니 킬리는 손에 잡히는 물건마다 죄다 팽개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얘만 없었어도 이렇게까지 싸울 일도 없었는데! 킬리는 그 날을 생각하니 다시 화가 치솟아 망치를 높이 들어 그대로 핀을 향해 내리쳤다. 그래 이 모든 건 그 애 때문이야.
"너만!"
킬리는 다시 한 번 망치를 내리쳤다.
"없었어도!"
또 다시 내리쳤다.
"이럴 필요까진!"
그리고 또 한 번 더.
"없었다고!"
'쨍강'하는 소리와 함께 잔뜩 망가진 머리핀이 두 동강이 나버렸다. 킬리는 씩씩 거리다가 망치를 바닥에 내던지고 동강난 핀을 집어 들었다. 굳이 필리를 쫓아나가 트집을 잡지 않아도 큰 싸움이 일어날 거리가 생겼다. 킬리는 우두커니 공방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킬리가 예상한대로 방금 전의 큰 싸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토록 킬리가 간절히 원했던 말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이젠 형제가 아닐 수 있어! 킬리는 크게 기뻐했다. 아니, 사실은 기뻐해야 했다. 기분이 좋아야만 했다. 킬리는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에 화를 내거나 충격을 받아서는 안됐다.
그런데 왜-
그토록 기다렸던 말을 필리에게 들었는데-
킬리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킬리는 그 사실이 믿을 수가 없어 방을 뛰쳐나갔다.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은 킬리에게 하나도 기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슬프고 아팠기 때문에 킬리는 길 한복판을 달리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킬리, 킬리!"
등 뒤에서 필리가 다급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킬리는 더 서럽게 울면서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필리도 질세라 뜀박질을 하며 킬리를 쫓기 시작했다. 석양을 등지고 그동안 그토록 싸워댔던 형제가 한 쪽은 엉엉 울고, 다른 쪽은 다급히 한 쪽을 쫓아가는 기묘한 술래잡기를 보는 마을 사람들은 함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는 멀어지는 광경을 멍청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평소 수염이 없다느니, 곱상하게 생겼다느니 하고 킬리에게 트집을 잡다 흠씬 두들겨 맞는 왈짜들도 동그란 눈을 하곤 둘의 시선을 쫓았다. 결국 언덕너머까지 달려 나간 둘의 추격전은 필리의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킬리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심하게 넘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킬리는 비틀린 발목을 부여잡고는 아까보다도 더 크게 울어재꼈다. 필리는 방금 전까지 화를 낸 것도 잊고 킬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릎이 죄다 까지고 발목이 벌써부터 붓기 시작한 게 성하게 집까지 걸어갈 리가 만무했다. 필리는 계속해서 울기만하는 킬리를 보며 걱정 반, 성 반으로 킬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뭐가 억울하다고 울어? 그런 말 듣기 싫었으면 애초에 못되게 굴지 말았어야지!"
"하디만-"
킬리는 뭐라고 반론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계속해서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거의 말을 잇지 못했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말들도 전부 뭉개져서 필리는 도통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필리는 답답함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피가 줄줄 흐르는 킬리의 무릎을 보며 일어나는 안쓰러움에 킬리를 안아 다독였다.
"우선 집에 가서 치료부터 하자. 업혀."
"조타...했자나."
"응?"
"나는...그냥,,,동생이라서...나보다...걔가...더..조타구..했자나..."
뭐? 필리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킬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필리의 머릿속에서 그 날의 일이 스쳐갔다. 너 설마! 필리가 경악스런 얼굴을 하고 킬리에게 물었다.
"그 말 때문에 날 괴롭힌 거였어? 그 별것도 아닌 말 때문에?"
"하지만...나는...형이...제일...좋은데...으아앙!"
킬리는 다시 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필리는 어이가 없어 울고 있는 동생이라도 머리에 알밤을 먹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겨우 그 말 하나 때문에, 내가 한 달을 넘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단 말이야?
"너 확 두고 가버릴 거야!"
"으아아앙!!"
"...우선 업혀, 이 머저리 같은 놈아."
필리는 제 덩치만한 동생을 억지로 업어들고는 힘겹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해가 거의 다 져서 마을에 등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필리가 땀을 뚝뚝 흘릴 때 킬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킬리의 울음이 조금씩 멎으면서 울음과 함께 튀어나오는 킬리의 사정 아닌 사정을 들은 필리는 동생이 아직도 괘심은 하나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필리가 알아들은 바로는 킬리의 사정이란 대략 이랬다.
"나는 정말로 형이 좋고, 형보다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형이 나보다 그 여자애가 좋다고 했을 때 너무 화가 났어. 근데 그 이유가 나는 형제기 때문에 그 애처럼 좋아할 수 없다고 했잖아. 난 형이 내 가족인 게 너무 좋았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깐 처음으로 형이 내 가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필리가 내 형제가 아니면 나도 걔만큼 형한테 사랑받을 수 있을 거 아냐.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봐. 막상 형한테 그 소리를 들으니깐 형이 나보다 걔를 더 좋아한다는 소리보다도 충격이었어. 내가 바보 같고 한심하고, 형한테 엄청 미안해지더라고."
그렇게 속내를 풀어낸 킬리는 마지막에 심하게 훌쩍이며 필리의 눈치를 살피며-
"이젠...훌쩍...정말로 내가...훌쩍...동생이 아니여쓰면...흑..좋을 정도로..흑!...미워?..흐윽!"
간신히 말을 끝내곤 다시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필리는 업힌 킬리를 추스르며 대답했다.
"물론, 아직 네가 밉기는 하다만-"
터진 울음을 참아내려는 킬리에게서 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네가 내 동생이 아닐 순 없잖니. 내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인데."
"그래도...내가...실차나..."
"싸운 날에는 항상 싫었어. 싫으니깐 싸우지.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놀고 그랬잖아."
"……."
"원래 형제가 싸우면 다 그런 거야."
킬리는 필리의 등에 살며시 얼굴을 파묻었다. 이미 땀에 젖은 등판에 눈물까지 적셔드니 필리는 오한이 느껴졌다. 파묻은 얼굴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킬리가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필리가 확실히 킬리의 말을 알아듣고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미안해, 킬리야."
* * *
"그래서 그 날 밤에 난리가 났었지. 소린께서야 필리가 쫓아 나갔으니 잘 될 거라 했지만 디스께서 울고불고 하시는 바람에 마침 근처에 있던 우리가 둘을 찾아 나섰는데 킬리 다리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지, 발목은 심하게 삐어서 퉁퉁 부어있지, 디스가 소린께 얼마나 소리를 지르던지-"
"발린-"
"워, 잠깐만요. 그게 끝이에요?"
빌보가 스프를 떠다말고 불만스런 표정으로 발린을 쳐다보았다.
"더 해야 할 말이 있나, 배긴스씨?"
"아니 뭐 저도 결혼을 하진 않았다만 숙맥은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좋아하던 여자애한테 줄 머리핀이 망가진 거였잖아요? 그런데 더 화도 안냈고, 서로 화해해서는 나란히 이둔의 송별파티를 갔다고요?"
"아니, 사실은 가지 않았어."
빌보는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호랑이도 양반은 못된다고, 자기 이야기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귀를 쫑긋 이던 두 형제가 기회가 오자마자 슬그머니 빌보의 양옆에 나란히 앉아 자연스럽게 발린에게서 이야기를 넘겨받았다.
"선물을 하겠다고 그렇게 호언을 했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잖아? 그래서 안 갔지."
"또 내 다리가 퉁퉁 부었으니 병간호 해줄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킬리가 이어서 맞장구를 쳤다.
"킬리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덕분에 필리의 첫사랑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잖아요!"
"뭐, 엄청 난장판이 됐기는 했지. 그 뒤로 이둔이 엄청 화가 나서 돌아간 뒤로 거의 이 십년동안 편지 한 통 없었으니-"
"뭐, 그래도 결국 오긴 왔어. 오해도 서로 풀었고. 나도 편지 보냈다고."
뭐 이런 형제가 다 있담? 빌보는 고개를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편지가 왔는데, 외로운 산을 되찾으면 철산이랑 거리가 가까우니 직접 방문해서 답장을 주려고 하거든."
"오, 아직 필리에게 기회가 없지는 않군요?"
빌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빌보를 본 난쟁이들은 호빗이란 종족은 거짓말에 재능이 전혀 없을 거라는 점에 모두가 소리 없이 동의했다.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필리만이 빌보의 말을 골똘히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미 지나간 일인걸."
"하지만, 편지를 보낸다는 건 호의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필리가 일부로 말꼬리를 길게 늘이자 빌보의 궁금함에 초조해진 표정을 바라보던 킬리가 입이 근질거렸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걔, 결혼했거든. 마지막에 온 편지가 임신했다는 거였어."
"네에--?"
빌보는 결국 고함을 내질렀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