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첫눈이 내렸다. 스나이퍼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의 커튼을 젖혔다. 유리창에는 하얀 서리가 도톰히 내려앉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감싸 안았는지 아침인데도 밖은 밤 마냥 어두웠다. 미국의 겨울은 스나이퍼가 매년마다 익숙하지 못한 것 들 중 하나였다. 스나이퍼는 거실의 등을 켜고 주방으로 천천히 걸어가 커피포트에 전원을 켰다. 커피포트 안에는 아직도 에스프레소가 반 정도 차있었다. 스나이퍼는 의자를 끌어와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이 참 많이도 쌓였다. 라디오를 켜니 캐롤이 한창 흘러져 나왔다. 한 곡이 끝나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커피포트의 전원이 꺼졌다. 스나이퍼는 커다란 머그잔에 한 가득 커피를 부었다. 그러고도 커피포트에는 아직도 커피가 남아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전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남지 않았는데…… 스나이퍼는 싱크대에 남은 커피를 모조리 부어버렸다. 커피 잔이 놓은 테이블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스나이퍼는 창가에서 눈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뒤로 하고, 스나이퍼는 베란다 문을 열고 거실 슬리퍼를 신은 채로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새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노란빛을 띄는 작은 새였는데 스나이퍼는 이 새가 무슨 종인지는 몰랐다. 다만 예전에 스파이가 기르던 카나리아와 무척이나 닮았다고는 생각했다. 스파이는 그 새에게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새를 무척이나 아꼈는데, 어느 날인가 새장청소를 한다고 잠시 문을 열어놓은 사이에 날아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실망하진 않았다고 스파이 자신은 애써 무덤덤하게 있었지만 스나이퍼는 그 작은 미소 사이로 떨리던 입술을 아직도 선명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스파이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새들은 말이야. 날아가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긴 해도, 날아가는 그 순간이 아쉬울 때가 있어.
스나이퍼는 조심이 작은 육체를 손으로 들어 올려 감싸주었다. 눈 마냥 차가웠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천 행주 한 장으로 새의 시체를 덮어주고는 작은 삽 한 자루를 챙겨 뒷마당으로 나가 담장 밑을 파내어 새를 묻어주고 잠시 묵념을 했다. 추운 날씨에 잘도 구름을 뚫고 높은 곳으로 날아갔구나, 작은 새야. 스나이퍼는 한동안 가만히 새의 무덤을 바라보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세안을 하고 옷을 두텁게 갖춰 입은 스나이퍼는 앞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걷는 거리는 쌓인 눈에 사람들이 발자국을 새기고, 또 그 위에 눈이 덮이고를 반복한 모습이 뚜렷했다. 스나이퍼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놓고 다른 사람들처럼 눈 위를 걷기 시작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스나이퍼는 고개를 들고 입김을 불어보았다. 뽀얀 입김이 잿빛 하늘위로 올라가다 부옇게 퍼져서 올라갔다. 올해 날씨가 그렇게나 춥다더군. 스파이가 어딘가에서 스나이퍼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스나이퍼는 고개를 외투에 파묻으며 계속 걸었다.
글쎄 스파이. 그렇지 않아. 올해가 더 춥거든.
스나이퍼는 커다란 작은 봉분 앞에 섰다. 오늘 그가 새의 무덤을 만들어 준 것보다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더 커다란 묘였다. 스나이퍼는 앙상하게 메마른 나뭇가지를 묘 옆에 놓아두었다. 길가에 핀 꽃도, 열려있던 꽃집도 폭설로 인해 오는 길에 단 한 번도 보질 못한 스나이퍼가 유일하게 선물할 수 있던 것이었다.
언젠가 눈이 녹으면 여기에 꽃이 필거야. 알잖아 스파이.
스나이퍼는 새의 무덤을 쳐다본 것과 같이 빤한 시선으로 스파이의 묘를 바라보았다. 무덤은 조용했다. 조용하다 못해 살아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스파이도, 잔디도, 가지마저 죽어있었다. 묘는 한적했고, 스나이퍼의 발자국만이 이 하얗고 고요한 도시의 유일한 산 증인이었다. 스나이퍼는 어쩐지 혼자만 살아남아 서글퍼졌다. 스나이퍼는 주머니에서 스파이의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생전에 남긴 스파이의 남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그 외에 스파이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까지도. 스나이퍼는 문득 스파이가 예전에 한 말을 기억해냈다. ‘어차피 잠시 머물다 가는 자유로운 생명에 이름표를 새기나?’ 왜 새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냐 물어본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스나이퍼는 혹시 스파이도 새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자유로운 생명이라 스파이는 이름이 없었나 보다. 그럼 우리는, 나는 무얼까 스파이? 스나이퍼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무덤 앞에 담배개비를 세워주었다. 응? 스파이. 스나이퍼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끝끝내 스파이는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올게. 스나이퍼는 등을 돌려 걸음을 걷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이 고요했다. 눈이 점점 굵어진다. 마치 살아있는 것들의 흔적을 지우듯이.
스나이퍼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파이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스나이퍼는 자신의 밴을 팔았다. 예전처럼 이리저리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마 스파이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스나이퍼는 이상하게도 스파이가 죽은 곳에서 몸이 묶였다. 자유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차 안은 후덥지근했다. 후덥지근해서 창문마다 허옇게 김이 서렸다. 스나이퍼는 창가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가 한 손가락으로 창문에 선을 그었다. 한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지만 스나이퍼는 개의치 않고 창가에 손가락으로 꾸물꾸물 무언가를 열심히 그렸다. 새 한 마리였다. 스나이퍼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새를 그렸다. 그리고 그 옆에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름 하나를 적었다. ‘스파이’ 그는 차창에서 손가락을 떼고 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는 잠시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창가에 다시 서려오는 김에 흐려지기 시작했다. 스나이퍼는 창가에 입김을 불었다. 새가 사라졌다. 스파이란 이름도. 스나이퍼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날아가는 그 순간이 조금 아쉬울 때가 있어 스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