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The hobbit/킬리필리] 형제 괴롭히기 (Bullying the Angel)
"둘이 참 사이가 좋아 보여요."
"어떤 친구들 말인가, 골목쟁이씨?"
"저 두 형제 말예요."
발린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개울가를 가리키는 빌보의 시선을 쫓았다. 미풍에 코가 간지러 가볍게 재채기를 한 발린의 찌푸린 눈에 서서히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뛰노는 젊은 형제가 보인다. 발린은 아직도 천진난만한 젊은 친구들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암, 그렇고말고. 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는 석양빛이 잘 쬐이는 바위에 자리를 잡은 소린이 무기손질을 하면서도 간간히 고개를 들어 두 형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굴곡 많은 여정 길에 찾아온 간만의 평화로다. 그러다 문득, 굴곡이란 생각에 발린에게 옛 추억이 떠올랐다.
"항상 저리 우애가 깊진 않았다네."
"오, 정말요? 상상이 잘 안 가는데요?"
"아마 자네가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시절만큼 오래된 일이긴 하지."
발린은 그렇게 말하며 빌보에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빌보는 크게 흥미가 동했는지 벌써 편하게 다리를 펴고 담뱃대에 담뱃잎을 채워 넣고 있었다. 발린도 필요하실 것 같은데요- 라고 너스레를 떨며 담뱃잎이 채워진 쌈지를 내미는 걸 보니 잠시의 흥미로 끝낼 생각은 없어보였다. 이 정도면 말값으론 충분하지. 발린은 내민 쌈지로 속이 빈 담뱃대를 채워 넣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척에 있던 소린마저도 무기를 손질하는 손이 느려지고, 그 옆에서 담뱃대를 물고 있던 간달프도 발린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모든 옛 이야기의 시작의 서두는 항상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니까 먼 옛날에…….
천사 괴롭히기
Bullying the Angel
for. 숲운님
***
"저 나이때는 저럴 때도 있는 법이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디스."
"드왈린, 자기 자식에게 어찌 걱정이 안 가는 순간이 있겠어요. 그리도 사이좋던 녀석들이 저런지도 벌써 한 달이에요."
그러고 보니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마을 어귀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못 본지 제법 오래됐다 했다. 오찬 상을 치우는 디스를 위해 그릇을 한 곳으로 가지런히 모으던 드왈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마시는 발린을 보며 자신들의 유년시절을 생각했다. 제법 나이차이가 나는지라 크게 다투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싸우거나 서로 감정이 상했던 기간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오랫동안 말을 안 했던 적이 며칠이더라?
"확실히 한 달은 좀 심하다 생각이 드네요. 제가 보기엔 큰 문제 같은데요, 소린."
"그렇죠, 발린? 거봐. 오빠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니깐."
부엌 선반에서 다과를 꺼내던 소린이 작게 한 숨을 내쉬며 형제 중작은 놈이 올라간 계단과 큰 놈이 나간 현관을 번갈아 쳐다보다 작게 신음을 흘렸다. 흠…….
그러니까, 마을에서 우애라면 둘째가 서럽던 이 형제가 생판 남을 대하는 것보다도 서로를 냉랭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이 어연 한 달이 지났다. 형제의 아미 되는 디스의 설명을 듣자하니 처음 시비를 턴건 킬리라는 동생이었는데 사사건건 필리의 말에 꼬투리를 잡거나 필리가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붙임성 좋던 녀석이 갑자기 왜 그런 거지?"
비스킷을 먹던 발린이 궁금한 듯 물었다. 모인 사람 중 가장 노대한 발린의 말인즉슨 킬리가 일방적으로 좋아 마다않던 형제에게 작경할 녀석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분명 필리에게도 킬리의 행동에 원인을 제공했을 터, 그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우선이라 하자 디스는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다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한, 필리가 킬리에게 못되게 군적은 한 번도 없는걸요."
"디스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일이 일어났겠죠. 이제 저 나이가 되면 자식들은 부모의 품보다는 넓은 밖을 더 사랑하는 법이니까요. 다만 필리가 집에 돌아올 때 넌지시 물어보는 것이 어른이 할 일이라 봅니다."
발린의 말에 디스는 불안한 듯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식사만 마치고는 쌩하니 제 방에 올라가 침대에 누워있을 작은 아들을 생각하니 절로 한 숨이 나왔다. 사내자식들 생각을 여인인 내가 어찌 알까? 소린은 그냥 말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하니 디스의 속은 더더욱 타들어갔다. 이럴 땐 소린보다 덜 과묵한 작은 오빠가 있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디스는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만약에라도 둘이 화해를 못해서 저리 어그러지다 한 명이 큰 사고라도 난다면 어찌하겠냐며 속으로 한탄하는 디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그제야 가만히 있던 소린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필리가 오면 내가 물어볼 테니 너무 걱정은 말렴."
발린과 드왈린은 두 남매를 바라보며 조용히 티타임을 즐겼다. 아직 젊은 공주님이 눈물이 많은 사실이나, 참나무방패께서 여동생에게 하염없이 약하단 사실은 둘에게 새로울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필리는 언덕 끝에 무릎을 안고 앉아 다른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갓 서른이 된 필리는 이제 거의 어른의 태가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모루에 쇠를 두들기는 것 보다는 친구들과 뛰어 놀거나 공놀이를 하는 게 더 즐거웠다. 그러다보니 넓은 아량으로 동생을 이해해보고자 노력을 해봐도 억울하고 화가 나는 감정을 억누르기란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생인 킬리가 킬리를 괴롭히기도 어연 한 달, 어젯밤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은 킬리가 베고 자는 베개의 천을 죄다 찢어놓았다. 갈수록 괴롭힘의 수위가 지나치다. 침대위에 산란한 베개속의 깃털을 보며 필리는 부득 이를 갈았다. 이 모든 괴롭힘이 무엇보다 필리를 분노케 하는 것은 도통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킬리가 자기를 괴롭히는 이유를.
처음에는 무언가 자기에게 섭섭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볼 때마다 날선 어투로 시비를 털기 시작하자 참아주는 것에 한계가 있던 필리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뭐가 불만인지 얘기하라는 말에는 말대꾸도 하지 않자 어느덧 필리 역시 킬리에게 화를 내거나 때리기도 했다. 아직도 둘의 눈에 맺힌 멍자국이 옅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한 달, 필리는 영문도 모른 채 지금까지 그렇게 막역했던 킬리와는 둘도 없는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어른들의 앞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수도,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찰 수도 없게 만들 정도로 필리를 화나게 했다.
물론 과거에도 몇 번이나 다투거나 주먹다짐을 한 적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앙금을 남기거나 오랫동안 토라진 적은 지금까진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필리에겐 불만이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을 한 거지? 아니, 이제 와서는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킬리의 괴롭힘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서로 계속 다투게 된다면…….
"필리?"
"아악!!"
필리가 펄쩍 뛰어오르다 하마터면 뒤에 있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때릴 뻔했다.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이 어린 난쟁이 아가씨는 가볍게 뒤로 발을 빼내며 입에 손을 가져다대곤 무어가 재미있는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사람이 오는 것도 몰라? 네 앞에서 걸어왔는데 눈치도 못 채더라."
"아니, 그게-미안."
필리는 더듬거리며 황급히 말을 마쳤다. 멀리 철산에서 친척을 만나러 가족끼리 먼 길을 온 이둔이라는 이 작은 아가씨는 도착한 첫 날,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필리의 시선을 훔쳐갔다. 킬리는 키가 너무 작다느니, 머리가 너무 곱슬이라느니하며 필리 앞에서 악담을 했지만 필리가 보기엔 그의 형제가 말한 불평은 결점보다는 그녀를 한층 더 귀엽게 만드는 장점 같았다. 그녀의 가족은 당초 청색산맥에서 백 일을 보내고 철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약조한 백 일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이는 킬리의 괴롭힘만큼이나 필리를 가슴 아프게 했다. 필리는 발그스레한 그녀의 통통한 볼을 좋아했는데 특히 웃을 때 그 동그란 볼이 눈가 바로 밑으로까지 들어 올려지는 게 무척이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나 좋아하는 얼굴인데 막상 바라보면 볼이 화끈해지면서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필리의 앞에서 속 편히 웃는 그 얼굴을 보기가 매우 수삽스러워 필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또 동생 때문이야?"
"그게-음-맞아."
필리는 뒷목을 매만지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둔은 팔짱을 끼고 기가 죽은 필리를 쳐다보다 필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사뿐히 앉았다.
"뭐가 화났는지 얘기도 안 해줘?"
"응."
"흐음."
필리는 옆에서 이둔의 숨 고르는 소리를 들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어쩐지 복잡한 마음이 좀 더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필리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슬금슬금 이둔을 쳐다보았다. 필리와 똑 닮은 노란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푸른 빛깔을 좋아하는 그녀에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이야. 필리는 저 머리에 푸른빛의 커다란 보석을 박은 머리핀을 꽂아주면 금상첨화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킬리와 처음 생경하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필리가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만들기 시작한 장신구가 바로 그녀에게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사실 이둔을 생각하며 만든 게 맞기도 했다. 일주일 후에 철산으로 돌아갈 이둔에게 자신과 청색산맥을 잊지 말아달라는 상징이며 필리의 완곡한 고백이기도 한 머리핀은 지금까지 필리가 사람들에게 배워가며 만들었던 그 어떤 장신구보다도 열과 성을 다한 작품이었고, 이제는 마무리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집에 잘 있겠지? 필리는 순간 킬리의 음흉한 얼굴이 떠올랐지만 억지로 생각을 떨쳐내었다. 그 순간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이둔이 입을 열었다.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닐까?"
"뭐?"
필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이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킬리가 널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고. 철산에 남아있는 우리 언니 이바 얘기 해주지 않았어? 형부가 어릴 적에 그렇게나 언니를 못살게 굴었는데 어른이 되자마자 고백해서 결혼했잖아. 난 아직 형부가 살짝 얄밉긴 한데, 우리언니가 더 이해가 안 간다니깐? 어릴 적엔 그리도 울고불고 싫어하더만, 어디가 좋아서 덥석 결혼이나 해버리고 말이야. 임신까지 해버려선 여기엔 오지도 못하고."
'아주 잘 알지. 그녀의 산달에 맞추려고 백 일만 있다 돌아가는 거잖아.'
필리는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대답했다. 이둔은 필리의 뚱한 표정이 그의 동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확신해선 좀 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내 요지는, 그러니깐 네 동생도 살짝 모난 성질이 있잖니? 한창 삐딱할 나이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좋아한다고 말을 하거나 삽삽하게 굴기 보다는 너를 괴롭히는 걸 수도 있어."
앞전에 필리가 회상했던 대로 킬리는 이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대할 때 마다 매번 퉁명스럽게 행동했고, 당연히 이둔도 킬리를 좋게만 생각하진 않았다. 필리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킬리를 낮잡아보는 이둔의 말에 살짝 난색을 표하면서도 나무라거나 항변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필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진 않을 거야. 그렇게 굴지 않아도 평소에 우린 서로를 매우 아끼고 좋아했거든."
"흐음, 그래?"
필리는 자신을 골똘히 쳐다보는 이둔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얼굴이 달아올라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이둔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필리는 숫기 없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창피해졌다. 이렇게 숙맥이니 킬리가 매번마다 괴롭히는 거 아닐까? 필리가 그렇게 혼자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이둔은 필리의 얼굴에서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노란머리카락이 산들산들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닷새 뒤면 저 머리카락과도 안녕이구나.
"사흘 뒤에 숙부의 집에서 송별파티를 할건데, 당연히 올 거지?"
"아……."
필리가 탄성을 내질렀다. 기어이 올게 왔구나! 필리는 참담한 속내를 최대한 숨기려고 입 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가야지."
"그래, 네 동생이랑도 화해해서 같이 왔으면 좋겠다. 요 근래 녀석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더니 그리워지려고 해."
필리는 방금 전의 억지웃음보다는 좀 더 편한 미소를 지었다. 이둔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진심이야. 둘이 예전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는 모습을 보고 떠나고 싶어."
"고마워."
필리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둔은 힘없이 쳐진 필리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필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가야돼. 숙모랑 저녁 장을 보러가기로 했거든. 해 떨어질 때 까지 궁상맞게 여기 앉아있지만 말고 친구들이랑 뛰어놀기라도 해봐."
"알았어, 잘 가."
"안녕, 필리."
이둔은 마지막으로 필리의 등을 힘주어 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리는 아릿한 등짝을 어루만지며 이둔의 파란 드레스가 나풀거리며 멀어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파란색 나비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겠지. 필리는 나비모양으로 만들고 있는 머리핀을 생각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세 사라졌다. 또다시 싸늘한 킬리의 얼굴이 필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필리는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화해하고 싶은데…….
* * *
"저녁이나 드십시다."
쇠붙이가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발린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간만에 고기가 들어간 스프라는 나름의 희소식을 들려줄 생각에 잔뜩 들떠있던 보푸르는 사람들의 화가 난 표정에 기가 죽어 배식을 받아가라며 황급히 말꼬리를 흐리며 힘없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도 물장구를 치던 젊은 형제는 언제 옷을 추슬러 입었는지 식사소리에 부리나케 발린의 일행을 지나쳐 커다란 솥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우리도 우선 배를 채우는 게 더 좋을 것 같네. 마침 담배도 다 피운 것 같으니 말일세."
"그러게요. 사실 저녁 먹을 시간이 조금 지난 것 같아요."
"호빗의 배꼽시계는 놀랍도록 정확하지. 그 시계를 잠시나마 늦춘 자네의 말솜씨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을 걸세, 발린."
간달프의 말에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저 멀리 솥 앞에서 스프를 그릇에 나눠담던 봄부르와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형제만이 무어가 그리 즐거워 저리 웃는지가 궁금해서 고개를 쭉 빼며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기분이 좋았다. 아니 사실은 아직도 좋진 않았다. 기분이 좋았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이보다 더 가벼워야 했다. 처음 집을 나설 때 보다는 좋아졌다는 편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필리는 집에 가까이 갈수록 커져가는 킬리의 심술궂은 얼굴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해야만 했다. 필리는 이둔의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은 파란 나비가 다시 활기차게 날갯짓을 하며 자신의 집으로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자신의 처지가 우선해지는 것 같았다. 필리는 상상속의 파란 나비를 쫓아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면 킬리는 생각하지 말자. 머리핀에만 집중하는 거야. 그리고 머리핀을 다 만들면 그 때는 꼭 킬리와 제대로 얘기를 해보자. 정말로 잘 되면 이둔의 송별잔치에 함께 갈 수 있을 거야.'
필리의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졌다. 마음도 딱 그만치만 가벼워졌으면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러지 않았나?
아프니깐 청춘이라고.
"필리야, 그러니까 이건 킬리가 부주의로 보지 못해서 실수로……."
부주의는 무슨! 필리는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식탁 한가운데에 머리핀이 처참한 몰골로 반 토막이 난 채 놓여 있었다. 조금만 손을 보면 완성될 작품이었는데. 필리는 허망한 표정으로 망가진 머리핀을 쳐다보았다. 디스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라 손가락을 꼬아가며 소린과 필리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소린은 근엄한 표정으로 필리의 이름을 불렀다.
"필리."
"킬리 어디 있어요?"
"내 말 들어라. 속상한건 알겠다만 크게 소란을 피우면-"
"위에 있구나."
필리는 걱정스럽게 위를 쳐다보는 디스를 보며 킬리가 위층에 있다는 걸 짐작했다. 처음의 망연자실하게 축 늘어진 양 팔에서 격노가 일었는지 뜨거운 힘이 솟아났고, 필리는 주먹을 꽉 쥐고는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필리, 킬리의 부주의함으론 이미 내가 꾸지람을 하였으니, 네가 더 다그칠 일은 없다!"
"망가진 물건은 내건데 왜 내가 화를 내면 안돼요?"
필리는 결국 소린에게 소리를 지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소린이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디스가 다급하게 필리를 쫓아가다 다시 돌아와 소린의 옷깃을 잡으며 흔들었다. 소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기다려보자.
필리는 킬리의 방문을 있는 힘껏 차댔다. 방 안에서 침구가 부스럭 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있지 않아 문의 걸쇠가 풀렸다. 필리는 그대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 밀린 킬리가 잠시 비틀거리더니 똑바로 서서 필리를 흘겨보았다.
"왜 그랬어?"
"뭐가?"
"머리핀. 왜 망가트렸어?"
"그게 그렇게 대단해?"
필리는 당장이라도 킬리의 얼굴을 냅다 주먹으로 한 방 갈겨주고 싶었다. 필리는 애써 손톱으로 살을 누르며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킬리는 그런 필리를 냉조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직접 꽂고 다닐 건 아니고, 선물하려 만들었나봐. 내가 망가트려서 어쩌냐?"
"이둔한테 줄 거였어. 너도 알잖아."
아, 그 악성 곱슬계집? 킬리가 짐짓 놀라는 투로 말하며 필리를 조롱했다.
"곧 떠난다며? 근데 이건 형을 위한 걸 수도 있어. 그런 형편없는걸 선물로 주면 걘 다시 널 보려고 하지 않을-"
결국 필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얼굴을 맞은 킬리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푸른 멍이 채 빠지지도 않은 눈가 바로 아래를 맞자 킬리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다고 킬리가 울거나 계속해서 소리를 내지르는 녀석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이미 킬리는 필리와 체격이 엇비슷해졌고 마을에서 꽤나 악동이었기에 킬리는 자신의 비명소리를 듣고는 황급히 계단을 뛰쳐올라오는 소리를 듣고도 그대로 달려오는 필리를 발로 걸어 넘어뜨리고는 위로 올라탔다. 그러다보니 이미 어른들이 올라왔을 땐 둘이 우위를 점한다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에게 수도 없이 주먹질을 하고 있었고 소린이 간신히 떼어내고도 서로에게 씩씩거리며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필리는 한참을 씩씩거리다 간신히 킬리에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너, 내가 형제라서 싫으냐?"
킬리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러나 어떠한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난 네가 내 동생인 게 진짜 싫은데."
"필리!"
소린과 디스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하지만 필리는 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난 너 따위 동생이라고도 생각 안 해!"
필리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한참을 더 씩씩거리다 강한 충격과 함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앞에는 화가 잔뜩 난 디스가 다시 한 번 필리를 때릴 생각으로 무섭게 서있었다. 형제를 사이에 두고 소린이 간신히 그들의 아미를 말리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필리는 남매가 옥신각신하는 모습 너머로 킬리를 쳐다보았다. 킬리는 더 이상 필리에게 화가 나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킬리의 표정은……. 필리가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그 아차, 하는 찰나에 킬리는 등을 돌려 방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방에 남은 세 사람이 단숨에 조용히 킬리가 뛰쳐나간 문 너머를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갑자기 정신을 차린 필리가 황급히 킬리를 쫓아 나섰다. 이제는 형제가 싸우던 방 안에 둘만 남은 소린과 디스가 덩그러니 서서 문 밖을 쳐다보다 디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린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 오빠 말을 믿으면 멍청이야."
* * *
형제가 아니었으면 했다.
킬리는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방금 전까지도 진심으로 필리와 형제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 발단은 너무나 사소한 거였지만, 킬리의 속에 내재되어있는 감정의 급류가 사소한 것이 아닌 것이 지금까지의 킬리의 심보를 만들었으리라. 그래서 킬리는 자신의 형제에게도 내가 저의 형제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담? 킬리는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방법이 있는지를 곰곰이 고민할 정도로 성숙한 나이가 아니었고,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영리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동생이라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괴롭히면 되겠지.
그 때부터 킬리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킬리라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형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 가장 나쁜 말을 하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로 형연할 수 없는, 괴롭힘에서 나오는 묘한 쾌감이라는 게 킬리의 약한 마음을 살살 꾀어내어 그만두게 두질 않았다. 훗날에 킬리가 이 날의 이유를 생각하자면 그 모든 게 질투에서 생겨난 것이었음을 쉽게 시인하겠지만, 이때의 킬리는 아직 질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를 때였다. 어쨌든 그렇게 킬리의 괴롭힘은 언덕에서 공을 굴리듯 점점 가속도가 붙어 그 정도가 심해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필리도 킬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시하기 시작했다. 무시를 못 하면 주먹이 나갔다. 킬리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무시를 하는 것 보다는 맞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을 쳐다보는 필리의 표정에 적개심이 생겨나자 킬리는 내심 기뻐했다. 어쩌면 정말로 필리가 날 동생이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거야!, 하고 생각을 할 때에는 가슴이 세게 쿵쾅거렸다. 진심으로 킬리는 그 정도로 필리가 형제가 아니었으면 했다.
그리고 결국 킬리가 원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사실 킬리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필리와 한바탕 크게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날 밤에 필리의 베갯잇을 전부 찢어버렸으니, 요즘 필리의 성정으로는 킬리를 본 순간 드잡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디스의 꾸준한 호들갑에 이른 아침부터 형제의 상태를 보겠다고 발린과 드왈린이 방문을 한데다가 며칠 동안 마을을 떠나있던 소린까지 돌아오는 바람에 둘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욕설 한 번 오가지도 못한 채 오전을 보내야 했다. 결국 화를 참을 수 없던 필리가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밖으로 휙 나가버렸는데 킬리는 이층 창문에서 씩씩거리며 뛰어가는 필리를 바라보며 적당히 시차를 두고 따라 나가 고투 질이나 해야겠다며 이번엔 어떤 거리로 필리를 화나게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쇳가루라도 끼얹어볼까? 킬리는 쇳가루의 유해성을 생각하며 다락에 만들어 놓은 작은 공방으로 올라갔다. 필리에게 시비걸기 시작한 이후에는 필리가 살다시피 하는 바람에 킬리는 여태껏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탁자위에 있는 파란 큐빅이 알알이 박힌 나비모양의 머리핀을 본 킬리는 필리의 실력에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필리는 항상 손재주가 좋았지. 킬리는 남몰래 필리의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을 하며 숨죽여 웃다가 다시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런데 누굴 주려고 머리핀을 만드는 거지?'
자신들의 어머니, 디스는 난쟁이 치고는 소박한 편이었기 때문에 머리에 커다란 보석 핀을 올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인 필리가 자기가 사용하려고 만든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킬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쳤다.
"이둔."
킬리는 입을 비쭉 내밀고는 구석 모루위에 놓인 망치를 집어 들었다. 맨망스런 계집아이! 킬리는 그 애가 온 순간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매도 사납고 필리에게 친한 척 막 대하는 꼴이 영 아니었는데, 그 계집한테 홀려 헬렐레 하는 필리의 표정을 보니 킬리는 손에 잡히는 물건마다 죄다 팽개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얘만 없었어도 이렇게까지 싸울 일도 없었는데! 킬리는 그 날을 생각하니 다시 화가 치솟아 망치를 높이 들어 그대로 핀을 향해 내리쳤다. 그래 이 모든 건 그 애 때문이야.
"너만!"
킬리는 다시 한 번 망치를 내리쳤다.
"없었어도!"
또 다시 내리쳤다.
"이럴 필요까진!"
그리고 또 한 번 더.
"없었다고!"
'쨍강'하는 소리와 함께 잔뜩 망가진 머리핀이 두 동강이 나버렸다. 킬리는 씩씩 거리다가 망치를 바닥에 내던지고 동강난 핀을 집어 들었다. 굳이 필리를 쫓아나가 트집을 잡지 않아도 큰 싸움이 일어날 거리가 생겼다. 킬리는 우두커니 공방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킬리가 예상한대로 방금 전의 큰 싸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토록 킬리가 간절히 원했던 말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이젠 형제가 아닐 수 있어! 킬리는 크게 기뻐했다. 아니, 사실은 기뻐해야 했다. 기분이 좋아야만 했다. 킬리는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에 화를 내거나 충격을 받아서는 안됐다.
그런데 왜-
그토록 기다렸던 말을 필리에게 들었는데-
킬리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킬리는 그 사실이 믿을 수가 없어 방을 뛰쳐나갔다. 그토록 듣고 싶던 말은 킬리에게 하나도 기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슬프고 아팠기 때문에 킬리는 길 한복판을 달리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킬리, 킬리!"
등 뒤에서 필리가 다급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킬리는 더 서럽게 울면서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필리도 질세라 뜀박질을 하며 킬리를 쫓기 시작했다. 석양을 등지고 그동안 그토록 싸워댔던 형제가 한 쪽은 엉엉 울고, 다른 쪽은 다급히 한 쪽을 쫓아가는 기묘한 술래잡기를 보는 마을 사람들은 함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는 멀어지는 광경을 멍청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평소 수염이 없다느니, 곱상하게 생겼다느니 하고 킬리에게 트집을 잡다 흠씬 두들겨 맞는 왈짜들도 동그란 눈을 하곤 둘의 시선을 쫓았다. 결국 언덕너머까지 달려 나간 둘의 추격전은 필리의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킬리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심하게 넘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킬리는 비틀린 발목을 부여잡고는 아까보다도 더 크게 울어재꼈다. 필리는 방금 전까지 화를 낸 것도 잊고 킬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릎이 죄다 까지고 발목이 벌써부터 붓기 시작한 게 성하게 집까지 걸어갈 리가 만무했다. 필리는 계속해서 울기만하는 킬리를 보며 걱정 반, 성 반으로 킬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뭐가 억울하다고 울어? 그런 말 듣기 싫었으면 애초에 못되게 굴지 말았어야지!"
"하디만-"
킬리는 뭐라고 반론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계속해서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거의 말을 잇지 못했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말들도 전부 뭉개져서 필리는 도통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필리는 답답함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피가 줄줄 흐르는 킬리의 무릎을 보며 일어나는 안쓰러움에 킬리를 안아 다독였다.
"우선 집에 가서 치료부터 하자. 업혀."
"조타...했자나."
"응?"
"나는...그냥,,,동생이라서...나보다...걔가...더..조타구..했자나..."
뭐? 필리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킬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필리의 머릿속에서 그 날의 일이 스쳐갔다. 너 설마! 필리가 경악스런 얼굴을 하고 킬리에게 물었다.
"그 말 때문에 날 괴롭힌 거였어? 그 별것도 아닌 말 때문에?"
"하지만...나는...형이...제일...좋은데...으아앙!"
킬리는 다시 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필리는 어이가 없어 울고 있는 동생이라도 머리에 알밤을 먹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겨우 그 말 하나 때문에, 내가 한 달을 넘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단 말이야?
"너 확 두고 가버릴 거야!"
"으아아앙!!"
"...우선 업혀, 이 머저리 같은 놈아."
필리는 제 덩치만한 동생을 억지로 업어들고는 힘겹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해가 거의 다 져서 마을에 등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필리가 땀을 뚝뚝 흘릴 때 킬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킬리의 울음이 조금씩 멎으면서 울음과 함께 튀어나오는 킬리의 사정 아닌 사정을 들은 필리는 동생이 아직도 괘심은 하나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필리가 알아들은 바로는 킬리의 사정이란 대략 이랬다.
"나는 정말로 형이 좋고, 형보다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형이 나보다 그 여자애가 좋다고 했을 때 너무 화가 났어. 근데 그 이유가 나는 형제기 때문에 그 애처럼 좋아할 수 없다고 했잖아. 난 형이 내 가족인 게 너무 좋았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깐 처음으로 형이 내 가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필리가 내 형제가 아니면 나도 걔만큼 형한테 사랑받을 수 있을 거 아냐.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봐. 막상 형한테 그 소리를 들으니깐 형이 나보다 걔를 더 좋아한다는 소리보다도 충격이었어. 내가 바보 같고 한심하고, 형한테 엄청 미안해지더라고."
그렇게 속내를 풀어낸 킬리는 마지막에 심하게 훌쩍이며 필리의 눈치를 살피며-
"이젠...훌쩍...정말로 내가...훌쩍...동생이 아니여쓰면...흑..좋을 정도로..흑!...미워?..흐윽!"
간신히 말을 끝내곤 다시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필리는 업힌 킬리를 추스르며 대답했다.
"물론, 아직 네가 밉기는 하다만-"
터진 울음을 참아내려는 킬리에게서 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네가 내 동생이 아닐 순 없잖니. 내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인데."
"그래도...내가...실차나..."
"싸운 날에는 항상 싫었어. 싫으니깐 싸우지.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놀고 그랬잖아."
"……."
"원래 형제가 싸우면 다 그런 거야."
킬리는 필리의 등에 살며시 얼굴을 파묻었다. 이미 땀에 젖은 등판에 눈물까지 적셔드니 필리는 오한이 느껴졌다. 파묻은 얼굴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킬리가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필리가 확실히 킬리의 말을 알아듣고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미안해, 킬리야."
* * *
"그래서 그 날 밤에 난리가 났었지. 소린께서야 필리가 쫓아 나갔으니 잘 될 거라 했지만 디스께서 울고불고 하시는 바람에 마침 근처에 있던 우리가 둘을 찾아 나섰는데 킬리 다리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지, 발목은 심하게 삐어서 퉁퉁 부어있지, 디스가 소린께 얼마나 소리를 지르던지-"
"발린-"
"워, 잠깐만요. 그게 끝이에요?"
빌보가 스프를 떠다말고 불만스런 표정으로 발린을 쳐다보았다.
"더 해야 할 말이 있나, 배긴스씨?"
"아니 뭐 저도 결혼을 하진 않았다만 숙맥은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좋아하던 여자애한테 줄 머리핀이 망가진 거였잖아요? 그런데 더 화도 안냈고, 서로 화해해서는 나란히 이둔의 송별파티를 갔다고요?"
"아니, 사실은 가지 않았어."
빌보는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호랑이도 양반은 못된다고, 자기 이야기라는 걸 안 순간부터 귀를 쫑긋 이던 두 형제가 기회가 오자마자 슬그머니 빌보의 양옆에 나란히 앉아 자연스럽게 발린에게서 이야기를 넘겨받았다.
"선물을 하겠다고 그렇게 호언을 했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잖아? 그래서 안 갔지."
"또 내 다리가 퉁퉁 부었으니 병간호 해줄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킬리가 이어서 맞장구를 쳤다.
"킬리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덕분에 필리의 첫사랑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잖아요!"
"뭐, 엄청 난장판이 됐기는 했지. 그 뒤로 이둔이 엄청 화가 나서 돌아간 뒤로 거의 이 십년동안 편지 한 통 없었으니-"
"뭐, 그래도 결국 오긴 왔어. 오해도 서로 풀었고. 나도 편지 보냈다고."
뭐 이런 형제가 다 있담? 빌보는 고개를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편지가 왔는데, 외로운 산을 되찾으면 철산이랑 거리가 가까우니 직접 방문해서 답장을 주려고 하거든."
"오, 아직 필리에게 기회가 없지는 않군요?"
빌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빌보를 본 난쟁이들은 호빗이란 종족은 거짓말에 재능이 전혀 없을 거라는 점에 모두가 소리 없이 동의했다.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필리만이 빌보의 말을 골똘히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미 지나간 일인걸."
"하지만, 편지를 보낸다는 건 호의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필리가 일부로 말꼬리를 길게 늘이자 빌보의 궁금함에 초조해진 표정을 바라보던 킬리가 입이 근질거렸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걔, 결혼했거든. 마지막에 온 편지가 임신했다는 거였어."
"네에--?"
빌보는 결국 고함을 내질렀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