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로는 내 어머니가 나에게 지어주신 ‘토니’라는 이름과,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하워드 스타크의 아들 토니 스타크’다. 앞서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보통 후자로 나를 많이 불렀는데 사실 그건 나를 뜻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그 치들에게 보이는 나는 딱 내 아비의 껍질을 쓴 작은 하워드 스타크였으니 그 사람들이 내 진짜 이름에 대해서는 한 톨의 관심도 없는 건 당연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였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사라진 때 말이다. 그것은 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아버지조차도 언젠가부터 나를 당신의 작은 후계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가물가물하게 회상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항상 아버지를 따라 크고 작은 온갖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를 소개시키고는 더 이상 소개시킬 사람이 없는 순간이 오면 나를 뒤에 있는 경호원에게 떠밀어 놓고는 딱 한마디를 하셨다. “격식을 차려라 토니.” 나는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높은 의자에 앉혀져 파티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스타크 부부의 키 작은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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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멀미라.”
“좋아 오늘은 날 엿 먹일 수 있겠군 미스 캡시클.”
“파티에서.”
“그래 파티에서.”
나는 테이블에 있던 싱글몰트 한 병을 집었다. 토니, 그만- 하고 입을 열었던 스티브는 내가 술로 가글을 하는 모습을 보곤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고지식한 영감은 일 하나가 잘못되면 세계대전이라도 일어나는 듯 행세하곤 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나는 술을 병체로 연거푸 들이키며 곁눈질로 스티브의 표정을 살폈다. 심각한 눈 안에 작은 아이 하나가 들어있었다. 바 의자에 앉아서 수많은 사람들을 쳐다보다 발도 닿지 않는 의자에서 간신히 내려오는 어린 아이가.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나는 정말 괜찮아 스티브. 그러나 스티브는 내 말을 부정했다.
“모두가 널 걱정하고 있어.”
“그들이 걱정하는 건 내가 아니야. 아무도 어린 소년이 사라진 줄 모르니깐.”
“토니, 자네 취했군.”
나는 검지를 올려 그의 입으로 갖다 대었다. 스티브는 시선을 내 검지로 옮기더니 자신의 손으로 내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따듯했다. 나는 취하지 않았어, 스티브. 나는 취하지 않았어. 나는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했다. 분명 해야 할 다른 말이 있을 텐데? 스티브는 다시 토하게 둘 순 없다며 내 손에서 술병을 뺏어갔다. 술병이 없으니 나는 무력해졌다. 비틀비틀 걸어가 간신히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스티브는 싱크대에 남은 술을 모조리 붓고 있었다. 나는 저 남자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챙기려 드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그가 부정하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집 잃은 사람, 자신을 잃은 사람,
외로운 사람.
그는 나 말고는 의지할 사람이 전혀 없던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세상에 떨어진 사람. 그는 퍽이나 나와 닮아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등은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였다. 스티브 내가 누구지? 스티브는 등을 홱 돌려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이었다. 내가 다시 물어보자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토니. 토니 스타크.”
“토니는 죽었어.”
“입은 살아 있는데?”
나는 그의 말에 웃었다. 그래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스티브는 나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괜찮아? 나는 쓰게 웃어 보였다. 아니 괜찮지 않아, 키스해 줘. 그는 조금 망설이는듯 하다가 주춤주춤 허리를 숙여 짧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도 뜨거웠다. 그의 체온이, 나의 체온이 이렇게나 남아있는데 왜 우리는 얼어 죽어있는가? 나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문득 옛날얘기가 생각이 났다. 그에게는 옛날 얘기가 아니겠지만…… 나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갔던 그 레스토랑 말이야, 뒤쪽에 작은 문으로 나가서 조금만 걸어가면 호수가 나오는 거 알고 있나?”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레스토랑은 말이야, 내가 열 살 때 아버지, 그러니깐 하워드 스타크를 따라갔던 곳이야. 그리고 나는 할 일이 없어 조용히 앞에 있는 바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가스터빈 엔진의 구동원리를 생각했지. 그러다가도 지겨워 졌을 때 말이야 창문가로 반짝이는 호수가 보이더라고. 그 때는 12월 말이었고, 호수는 얼어있었지. 혼자 남은 열 살 소년이 언 호수를 보고 무엇을 생각 했을 것 같아?”
“호수로 나갔군.”
“맞아. 날이 매우 추운 날이었어. 전날도, 전전날도 눈이 내렸으니깐. 호수는 꽁꽁 얼어있었어. 아이가 보기에는 말이야. 첫 발을 디디고 두 번째 발을 디디고도 호수는 단단했어. 그러니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나는 손가락을 쫙 핀 한 손을 들어올렸다. 스티브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올라갔다. 나는 그대로 손을 수직으로 하강시켰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빠졌어? 나는 빙그레 웃었다. 맞아 빠졌어.
“얼마 가지 못했는데 서 있는 자리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났어. 빨리 한 발을 뒤로 하면 되었을 일인데 그거 알아? 얼음이 깨지는 거 말이야, 굉장히 빠르더군. 엎드린 채 자빠졌는데 칼에 베인 것 같았어. 옷을 그렇게 두껍게 입었는데 등까지 차오르는 물이 차다 못해 뜨겁더라고. 상체는 간신히 얼음판에 매달리고 하체는 바동거리면서 ‘살려주세요’를 외쳤는데-“
“누군가 자넬 찾아왔겠지. 그 경호원 말이야.”
“아니, 아무도 안 찾아왔어. 나 혼자 올라왔지 작은 손을 이렇게 쫙 펴서 기대고 있던 얼음판위로 기어 올라왔어. 정말 무서웠어. 올라오는데 1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하루가 지난 기분이었지. 다리가 마비가 된 듯 후들후들 떨렸어. 단단한 얼음판을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갔지. 그리고 덜덜 떨다가 몇 번이나 주저앉은 뒤에야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갔지.”
그럴 리가. 스티브는 굉장히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었지?”
“말했잖아. 토니를 죽었다고. 어린 토니를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던 거야. 내가 쫄딱 젖은 채 레스토랑으로 걸어 들어가니 그제야 사람들이 나를 보고 경악을 했지. 담요를 덮어주고 라디에이터로 데려가서 몸을 녹이고 있으니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내 잘난 아버지께서 오시더군.”
나는 순간 울컥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삼키었다. 그리고 나한테 말했어. 창피한 줄 알라고. 스티브는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라는 커다란 벽이 생겼다. 하워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스티브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다시 쓴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날로 어린 토니는 죽은 거야.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하워드의 아들 토니 스타크가 남았지. 나는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슬펐다.
“울상 짓지 마 영감님. 난 단지 1분만 빠져있었다고, 자네는 몇 년이지? 70년?”
스티브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술이 깨야 할 필요가 있다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나는 그가 어루만진 내 머리를 만지며 비로소 우리의 열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얼음 위를 위태위태 걷고 있는 사람들. 호수에 빠졌던 그 날의 한기였다. 너무 차가워 오히려 뜨거웠던 그 한기. 결국 우리는 열기라곤 없는 송장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그는 동정심을 담아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젠 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곁에 있잖아.”
“아니, 그럴 리가.”
얼음을 꺼내던 스티브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자네도 나처럼 이미 죽은 사람이야. 죽은 자들 말고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누가 있지?”
스티브는 말이 없었다. 묵묵하게 트레이에서 얼음을 꺼내는 소리가 난다. ‘짤랑’ 얼음끼리 맞부딪치며 잔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저 소리가 우리의 관계를 나타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떨어지며 깨어지는 얼음들. 진저에일을 따르는 스티브의 어깨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나는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떨지를 생각하며 차디찬 등에게 소리 없이 물었다. 위태위태하게 빙판길을 걷는 심정이 어때요 캡틴 아메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