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The Hobbit]형제이야기 (The Story of Kili and Fili)
난쟁이(Dwarf)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제 그 실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단지 조상으로부터 구문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작고 신기한 존재들을 말이다. 우리는 그들이 한 때는 이 땅위에서 우리들과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내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할머니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주 어릴 적에 낡은 서고 아래 칸에 꽂혀있던 작은 동화책에서 읽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드워프들은 작고, 뚱뚱하고, 수염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얼굴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손재주가 좋아 장난감이나 훌륭한 무기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보물에 욕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 중 몇 명은 보물에 눈이 멀어 도둑질을 하다가 영웅들에게 혼쭐이 나는 이야기도 몇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이것들이 드워프들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면 여러분들은 드워프가 어떤 종족이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드워프들은 더욱 현명한 종족이다. 그들은 훌륭한 장인이며, 한 때는 인간들보다도 번영한 왕국을 만들었고, 그들의 현명함은 다른 종족이 함부로 알 수 없게 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언어로 기록 한 수많은 문헌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들이 재물과 보석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물보다도 긍지와 명예가 높은 종족이었다(많은 드워프들이 도둑이었다는 사실은 당연히 거짓말이다). 여러분이 만약 이 작고 현명한 종족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면, 그들이 살았던 옛 터전에서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한 서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적의 이야기로, 드워프들 중 그 누구도 이 작은 왕족의 이야기를 자세히 적어놓지 않았다. 그들에 관한 역사는 그들이 살았던 인생만큼이나 짧게 기록되어있지만 사실 글자보다는 그들이 살아온 시간이 더 긴 법이다. 나는 그들이 기록된 역사보다 좀 더 길고, 좀 더 사적인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해주려고 한다. 때는 아주 먼 옛날, 동쪽의 거대한 궁터인 깊은 골에 엘프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고, 북동쪽 끝자락의 높이 솟은 산, 에레보르 아래의 드워프들의 버려진 성에는 불을 뿜는 사악한 용이 깊은 잠을 자던 시절. 이제는 우리에게 잊혀 진 외로운 산의 왕과 금색 머리의 드워프 왕자가 있었다.
형제 이야기
The story of Kili and Fili
<부제 : 나의 황금의 왕이여>
Wrote in December 31, 2013
◆
옛날의 역사를 들춰보면, 청색산맥에는 항상 드워프들이 함께했다. 돌름드 산이 가장 번영했던 나무의 시대와 태양의 시대의 왕국, “노그로드”와 “벨레고스트” 이후에도 드워프들은 항상 청색산맥에 거주했다. 그리고 좀 더 훗날, 크하잣둠과 에레보르의 권리를 가진 자들, 두린의 자손들이 다시금 그들의 왕국을 작게나마 재현시켰다. 그 옛날 사악한 용에 의해 터전을 잃은 두린의 일족들은 젊은 왕자를 따라 인간들의 도시 이곳저곳을 떠돌다 청색산맥 남쪽에 정착하던 인간들의 마을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를 베고, 마을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어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끌던 젊은 왕자인 소린에게는 배부른 어린 누이동생과 갓난쟁이 조카가 있었다. 샛노란 머리를 가진 그녀의 이름은 디스였고, 드워프의 역사에 유일하게 기록된 여성 드워프였던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무척이나 성숙하고 총명했다. 디스는 총 두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첫 째 필리는 자신의 어머니와 증조부를 꼭 닮은 금색 머리를 가진 드워프였다. 동생인 킬리는 검은 머리였는데, 디스보다는 할아버지인 스라인과 삼촌인 소린을 똑 닮았다. 소린은 두 조카를 끔찍이 아꼈는데 난쟁이 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단을 이끄는 디스가 자주 집을 비울 때 마다 난롯가에서 양 무릎에 두 조카를 앉히고 옛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소린은 두 조카들이 휘청거리지 않고 뛸 수 있을정도로 자랐을 때 나무로 만든 검을 한 자루씩 나눠주고 그들을 마을 뒤에 있는 숲으로 데려갔다. 나무가 높이 솟아있는 숲속에서는 두 막대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마다 들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흘러 막대기가 부딪히는 소리는 철이 부딪히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 날도 산에서는 철이 튀는 소리가 났다. 필리의 칼이 허공에서 돌다 땅으로 떨어졌다. 중심을 이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은 필리의 귓가로 소린의 짧은 말이 들렸다.
“거기까지. 킬리 승.”
필리는 슬그머니 고개를 올려 자신의 삼촌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킬리의 키가 필리와 한 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시작하면서 부터 필리는 킬리에게 대련으로 이겨본 적이 없었는데, 그 때마다 소린이 자신을 쳐다보면 필리는 그의 송골매 같은 눈빛이 자신을 나무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의 주변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킬리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소린을 바라보다 소린의 고갯짓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점잖은 체하며 넘어진 필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필리는 킬리의 작은 손을 바라보다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킬리는 뻗었던 손을 멋쩍었는지, 몸 뒤로 집어넣었다. 필리가 다시 소린을 바라보았을 때, 소린은 냉담하게 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필리는 다시 부끄러움에 시선을 돌렸다. 곧게 뻗은 숲길 끝자락에 맞닿은 마을의 종탑에서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작은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셋이 있는 곳까지 전해져 왔다. 돌아갈 시간이구나. 소린은 나무에 묶어놓은 조랑말의 줄을 푸르기 시작했다. 필리는 앞으로 달려가는 킬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킬리가 조랑말 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인데, 그 덕에 키가 작은 킬리는 아직까지 조랑말에 올라타는 법이 미숙했다. 그 점은 필리에겐 퍽 다행인 일 중 하나였는데, 그러면서도 필리는 자신의 동생이 언젠가 자기만큼 키가 커져 자신보다 조랑말을 능숙히 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질 못했다. 필리는 킬리와는 다르게 능숙히 조랑말에 올라탔다. 안장 밑으로 두 발을 빼는 순간, 거센 말의 콧김에 신경 쓰는 것은 필리의 일이 아니었다. ‘왕가의 위엄을 갖추도록 능숙히 말을 타지 않으면 소린께선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필리는 말고삐를 단단히 쥐고 이미 말을 몰기 시작한 소린과 킬리를 뒤쫓았다.
어린 필리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 디스가 항상 함께 했다. 그녀의 금빛머리는 어린 필리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과 용기를 주곤 했었는데, 난롯가에서 붉게 타오르는 빛에 섞인 머리카락은 안개산맥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물든 노을빛 하늘같았다. 필리는 어머니와 같은 자신의 머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동생 킬리가 철로 만든 칼을 들고, 발린이 만들어 준 작은 장난감 활로 마을의 논밭을 해치던 멧돼지의 눈을 꿰뚫기 전까지는 말이다. 킬리의 용맹함이 소린을 닮았다는 소문이 입과 입을 통해 청색산맥의 모든 드워프들에게 전해졌을 때, 필리는 어머니 디스가 살아생전 들려줬던 용맹했던 드워프 왕들의 일화를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용맹하고 명예로운 전사였단다. 필리가 아는 용맹한 드워프는 그들의 첫 선조 두린이 그리하였고, 에레보르의 왕국을 재건한 산 밑의 왕, 그의 증조부인 스라인이 그리하였으며, 수염을 짧게 하고 망국의 설움을 잊지 않는 자신의 삼촌인 소린이 그러했다. 필리는 그 수많은 드워프 왕들 중 소린이 가장 용맹하고 명예로운 드워프라 생각을 하였는데, 필리는 자신의 동생인 킬리가 그를 무척이나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검은 머리색마저도. 필리가 자신의 노란 머리를 싫어하기 시작할 때가 그쯤이었다. ‘내 동생이 우리의 삼촌을 무척이나 닮았구나.’ 라고 생각하던 날부터 말이다.
“- 그래서 내일 활을 만들 무기를 찾으러 갈 거야!”
필리는 킬리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랑말이 걸을 때마다 엉거주춤하게 몸을 흔들며 간신히 말고삐를 쥐면서도 킬리는 조잘거리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필리는 소린의 등을 쳐다보다 킬리를 나무랐다.
“아서라, 드워프가 무슨 활을 다룬다고?”
“뭐? 무시하지 마! 삼촌께서도 활 쏘는 게 항상 중요하다고 하셨다고. 게다가 나만큼 활 잘 쏘는 드워프는 없다고 하셨어. 그렇죠 소린?”
필리는 코웃음을 치며 소린의 등을 다시 쳐다보았다. 소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조차도 끄덕이지 않았지만 필리는 꼿꼿이 선 등에서 소린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매일 삼촌 얘기뿐이야. 삼촌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
필리는 입술을 비틀었다. 더 이상 킬리의 수다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필리는 말고삐를 좀 더 세게 쥐며 말을 재촉했는데, 이 성급한 행동은 필리에게 화를 불렀다. 필리의 조랑말은 본래 갈색 갈기를 가진 다리가 유난히 두꺼운 녀석이었으나, 일전에 마을 축제에 이용할 자제를 나르다 왼쪽 앞발을 다치고 말았다. 필리의 말을 빌려갔던 마을 남자는 필리에게 사과의 의미로 하얀색의 조랑말 하나를 선물해줬는데, 필리는 자신의 말이 다시 건강하게 뛰어다닐 때 까지만 이 말을 타기로 했었다. 문제는 이 조랑말이 이제 막 성체가 된 암말로, 어제부터 느닷없이 발정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소린의 말을 관리하던 마굿간지기는 태생이 게으른 사람이었는데 이 하얀 암말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필리에게 냉큼 고삐를 쥐어주었다. 어린 필리는 발정기가 온 암말을 다루는 법을 알 리가 없었는데, 당연하게도 필리의 말을 고분고분히 듣지 않고 평소보다 부산스럽게 구는 종마에 깜짝 놀랐다.
“어, 잠깐만. 말이 오늘따라 좀 이상한데? 야, 움직-”
필리는 말고삐를 세게 끌어당기며 조랑말을 멈추려 했지만, 흥분한 조랑말은 오히려 성을 내며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소린이 자신의 말을 세우기도 전에 필리는 고개를 치켜세우는 말에게서 중심을 잃고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킬리는 깜짝 놀라 말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형제의 이름을 소리치며 불렀다. 소린은 재빨리 말에서 내려 앞발을 치켜드는 말의 고삐를 잡고 달래기 시작했다. 필리는 땅에 가만히 누워 말발굽이 잦아드는 소리를 들으며 오른쪽 팔을 부여잡았다. 낙마하면서 팔을 땅에 크게 박은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말을 진정시킨 소린이 재빨리 필리를 안아 올렸다. 킬리가 말에서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소린에게 물었다.
“소린! 필리는요?”
“소란 떨지 말고 말에서 내리려 하지 마라 킬리. 필리의 말을 나무에 메어두고 바로 갈 테니 너는 의원으로 가서 집으로 오라고 전해라.”
킬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필리와 소린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잠시만 바닥에 누워 있어라. 필리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은 소린이 일어나 필리의 말을 끌고 기다란 나무로 걸어갔다. 필리는 아픈 팔보다도 얼굴이 더욱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아, 부끄럽다. 킬리는 말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
필리의 귓가에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숲길에서 아픈 어깨와 씨름을 하던 필리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더 이상 차가운 숲속에 있지 않았다. 그 대신에 따듯한 난로가 있는 자신의 방 안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필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물론 모든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까보다도 팔이 더 아픈 것 같았는데, 얼마나 아팠는지 필리는 아주 잠시 동안 자신이 팔이 장작대신 난로에 들어가 불타고 있는 게 아닌가를 의심했다. 다행히도 난로에서 불타고 있지는 않았지만, 석고를 데어 붕대를 감은 오른쪽 팔은 장작개비와 별 다를 바가 없다고 필리는 생각했다. 필리를 치료하던 의원은 필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소린을 안심시켰다.
“심하게 다친 곳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팔이 부러졌으니 몇 주간은 팔을 쓰면 안 됩니다. 하루 두 번 이 약을 한 숟갈씩 물에 타서 먹이시고요. 붕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갈아주시면 됩니다.”
“고맙소.”
소린이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의원은 방금까지 달그락 거리며 열심히 가루를 빻던 약재도구에서 고운 가루약을 천 보자기에 덜은 뒤 곱게 싸매 소린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할 일인걸요. 아, 그나저나 드워프 양반, 우리 아들이 이번에 근위병이 되었다는 서신이 저 멀리 에도라스에서 왔습니다. 나는 항상 내 아들에게 온갖 위험한 소식들이 들려오는 남부에 있지 말고 순찰자들과 요정들이 보호하는 에르아도르로 다시 오라 말을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이 놈이 경비병이 되었다는데 그럴싸한 장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검을 하나 만들어 드리리다.”
“거 정말 고맙습니다. 진료비는 그걸로 충분하고도 남지요. 내가 당신 같은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필리는 의원의 말에 한 번, 고개만 끄덕이는 소린의 행동에 두 번 실망했다. 일족을 이끌고 인간들의 마을을 전전했을 때와, 청색산맥에 정착하고도 십 수 년을 대장장이로 생계를 해결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필리에게는 그의 삼촌이 두린일족의 유일하고 적법한 자신들의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필리는 사람들이 소린을 단지 대장장이라 부르는 것과, 그것에 화내지 않는 것은 소린과 모든 조상들에 대해 엄청난 실례이자 수치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필리는 편치 않은 몸을 일으켜서라도 의원에게 소리를 질러야만 해다.
“말조심해요! 우리 삼촌은 대장장이가 아니라 산 밑의 왕이라고요!”
필리의 호통에 의원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 소린은 철없는 조카의 행동을 엄하게 나무랐다. 필리! 소린의 호통에 필리는 다시 기가 죽어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소린이 의원에게 사과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조카가 삼촌을 끔찍이 아끼나 봅니다. 의원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소린에게 몇 마디 필리의 팔에 관한 당부를 해주고 방을 나섰다. 소린은 의원을 따라 문 밖까지 배웅을 하러 필리의 방을 나섰다. 아래층에서 필리의 몸상태를 묻는 킬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리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당겼다. 삼촌은 항상 나만 미워하시는구나.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말에 필리가 낙마한 이후 내내 울상이었던 킬리의 얼굴에 약하게 웃음꽃이 폈다. 킬리는 네 형제가 푹 쉬도록 놔두라는 소린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계단을 뛰어올라 단숨에 방으로 들어왔다. 사실 필리의 방은 킬리의 방이기도 했는데, 문에서 가까운 침대는 킬리의 침대였고, 커다란 창문 아래의 침대는 필리의 침대였다. 킬리는 머리까지 이불을 올리고 있는 필리에게 조심히 걸어갔다.
“필리, 괜찮아?”
필리는 눈 밑까지만 이불을 내려 배꼼 킬리를 바라보았다. 킬리의 옷이 흙투성이였다. 필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킬리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옷이 왜 이렇게 흙투성이야?”
“너무 급하게 말에서 내리느라 넘어졌지 뭐야. 손이 조금 까지긴 했는데 심하진 않아.”
“이리 봐봐.”
필리는 성한 손으로 등잔불을 켜서 탁자위에 올려놓고 킬리의 손을 펴보라 했다. 킬리의 손에는 피가 굳어 붉게 딱지가 진 생채기들이 나있었다. 필리는 그대로 누워있으라는 킬리의 걱정은 듣지도 않은 채 방 안을 뒤져 연고를 찾아내고는, 킬리에게 바르라고 하였다. 킬리가 약을 바르는 동안 소린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킬리야,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는 그 모습을 보며 킬리가 별로 다치지 않았다는 점과, 킬리도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
붕대를 감고 생활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리는 어느 순간부터 통증보다 붕대의 불편함에 더 많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포크를 써야 했으며, 옷을 갈아입는 것이나 씻는 것까지 남의 도움이 없으면 혼자 해낼 수가 없었다. 디스는 그 당시 상단을 이끌고 곤도르로 향했기 때문에 팔이 불편한 필리를 돕는 건 당연히도 킬리와 소린이었는데, 사실 킬리는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오히려 필리가 갑갑하다며 붕대를 풀려는 것을 같이 돕다가 소린에게 들킨 이후에 소린이 집을 비울 일이 있으면 발린이나 다른 드워프들이 어린 두 형제를 챙기려 집에 오곤 했는데, “애 보모노릇까지 해야 한다니 미치겠군!”이라 말하는 한 드워프의 불평이 소린의 귀에 전해진 뒤에는 소린은 잠시 일하는 것을 멈춰야만 했다. 필리가 낙마한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필리는 처음으로 아주 잠시 동안 붕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붕대를 새 걸로 갈아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필리는 가벼워진 오른팔을 움직이다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그 뒤로 필리는 붕대에 대한 불평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에, 소린은 더 이상 필리가 붕대를 풀려 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얻어 다시 일을 하러 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필리는 팔을 다친 이후 처음으로 시내를 나섰다. 마침 장날이었는데 광장을 낄낄거리며 뛰어다니던 아이들이나, 장 소식을 듣고 다른 마을에서까지 내려와 시장가에 몰려든 사람들 전부가 필리보다도 키가 한 뼘 이상은 컸다. 이 때 킬리는 소린의 심부름을 하러 필리의 곁에 없었는데, 검술과 싸움에 능숙한 킬리가 보이지 않자 키 작고 사납게 굴던 드워프 형제를 좋아하지 않던 아이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람이 붐비던 곳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작은 돌멩이가 날아와 필리의 머리를 맞췄다. 깜짝 놀란 필리가 돌멩이가 날아온 곳을 쳐다보니 꼬마들 몇 명이 모인 무리가 필리를 보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야, 난쟁이! 우리 아빠가 난쟁이 놈들은 다 악마라는데 그게 사실이냐?”
청색산맥은 예로부터 드워프들의 주거지였지만, 사악한 세력들과 던랜드인들의 횡포에 서쪽으로 이주한 로히림들과 과거 아르노르의 인간들 일부가 모여들어 작게나마 정착지를 만들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청색산맥으로 다시 돌아온 드워프들과 잘 지냈지만, 몇몇 드워프가 낯설었던 어리석은 사람들은 드워프들의 귀환이 반갑지만은 않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고 심성이 악한 몇몇 이들은 이들 드워프가 악을 가져오는 사악한 종족이라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필리를 괴롭히는 무리의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가진 부모를 둔 아이들이거나, 그냥 키 작고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포악한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필리는 그런 아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드워프였다.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소린에게서 왕족의 예절을 배워왔으며, 이 곳에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들과는 불화를 일으켜선 안 된다는 주의를 항상 들어왔다. 또한 필리의 키가 이들 중 가장 작긴 하지만 나이는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필리는 되도록 점잖게 이 일을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필리를 쫓아다니며 더욱 괴롭혔으며, “키도 병신이 놈이 팔까지 병신이 되었다.”라며 필리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필리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결국 필리가 참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 필리에게 돌을 던진 아이가 다시 한 번 필리를 도발했기 때문이었다.
“네 동생은 어디 있어? 걔는 다리병신이라도 되었나 보지?”
단 한 번도 소린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필리는 소린의 가르침보다 우선시하는 자신만의 원칙 몇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필리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가족을 모욕하는 자들은 절대 용서하지 말자’였는데, 사실 이런 상황이 생기게 되면 필리는 생각을 하기도 전 부터 몸이 움직이곤 했었다. 필리는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둘은 한동안 내린 빗물이 채 마르지 않은 흙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필리는 어렵지 않게 우위를 점했다. 필리의 왼손이 아이의 얼굴을 쉼세 없이 가격했다. 다른 아이들이 달려와 필리를 말리며 때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싸움이 격렬해 지는데도 사람들은 그 광경을 쳐다볼 뿐 섣불리 말리지 못했다. 그 순간 큰 사람들의 무리에서 작은 형체 하나가 급하게 달려 나왔다. 소린의 심부름을 갔다 돌아오던 킬리였다. 킬리가 고함을 내지르자 필리와 바닥에서 뒹굴던 아이들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젠장! 검은 머리 드워프가 왔어!”
아이들이 화난 킬리를 보고 움찔거리자 킬리는 주저 없이 허리에 찬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본 아이들이 새파랗게 질려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점은 싸움을 구경하던 어른들도 다를 바가 없었는데 저마다 수군거리며 킬리를 피해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킬리는 필리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필리, 괜찮아?”
“이 멍청아, 소린께서 알면 어쩌려고 칼을 꺼내?”
킬리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필리가 씩씩대며 킬리에게 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거야 저 녀석들이-”
“너 때문에 우리 둘 다 혼나게 될 거야.”
필리는 킬리가 쥐고 있던 칼을 뺏어 킬리의 칼집에 신경질적으로 꽂아 넣었다. 킬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필리는 킬리를 내버려두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옷에서는 구정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동안 얼이 빠져있던 킬리가 뒤 늦게 필리의 등 뒤에서 화가 났는지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뭐가 그렇게 잘못한 건데! 내가 널 도운 거라고!”
◆
“거리에서 칼은 왜 꺼냈느냐?”
어린 드워프 형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소린은 화를 풀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둘은 집에 들어온 뒤로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문 앞에서 소린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보다 못한 발린이 둘을 도우려 나섰다.
“들어보니 마을 꼬마들이 몸이 불편한 필리를 괴롭혔다 합니다.”
발린의 말에 킬리의 표정이 환해졌다.
“맞아요! 걔들이 필리를 막 때리고 있길래-”
“그만!”
킬리가 사정을 말 하려고 하자 소린이 킬리의 말을 막았다. 킬리는 다시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소린은 킬리의 허리춤에찬 칼을 뺏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너희가 칼을 들어 어린애들을 위협했다는 사실이 옳았다고 생각하느냐? 단지 돌멩이를 들어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칼로 응징을 하라고 내가 너희들에게 검술을 가르쳤느냐? 네가 말해봐라 필리.”
모두의 시선이 필리에게로 향했다. 필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화가 난 소린의 내려다보는 눈과, 불안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킬리의 눈, 걱정으로 가득 찬 발린의 눈을 바라보던 필리는 이윽고 소린과 눈을 마주치며 조심히 앞으로 나섰다.
“그건... 제가 킬리보고 도와 달라 했습니다, 소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서 위협해 달라고 했어요.”
필리? 킬리가 놀라 필리의 이름을 불렀다. 소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가 부탁했다고?”
“네. 그러면 애들이 도망갈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소린은 필리와 킬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킬리는 적잖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반면에, 몸은 벌벌 떨고 있지만 필리는 침착한 표정으로 소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린은 한 동안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을 것을 주지 않겠다.”
“소린!”
킬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린의 이름을 불렀지만 필리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네. 하지만 소린의 벌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소린은 방금보다 더 엄한 표정으로 필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너와 싸운 아이들의 집마다 찾아가 사과를 하고 그 증거로 그들의 부모에게 서명을 받아와라. 그 전까진 집에 들어오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그 말에 필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반항하지는 않았다. 필리는 소린에게 절을 하고 힘없는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문이 굳게 닫히자 킬리는 필리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 소린과 발린을 다급하게 쳐다보았다. 킬리는 재빨리 소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소린, 제가 해명할게요.”
“너도 책임이 없는 게 아니다. 당장 방으로 들어가 자숙해라. 깊이 반성할 때 까지 검은 돌려주지 않겠다.”
킬리는 소린의 말에 따르지 않고 필리가 나간 문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결국 소린이 킬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당장!”
킬리는 더 말하지 못 하고 풀이 죽은 채로 방에 들어갔다. ‘끼익’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가 들렸다. 아마 킬리는 방으로 들어가 필리의 침대위에 있는 창문을 통해 해질녘의 거리로 사라지는 필리를 점이 될 때 까지 쳐다볼 것이다. 발린은 킬리의 검을 만지작 거리는 소린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린, 필리가 말한 게 사실이 아닌 것은 알고 계십니까?”
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렇다면 왜 그렇게까지 엄한 처사를 하십니까? 옷은 흙탕물로 다 젖어있고, 몸도 성치 않은 아이지 않습니까?”
발린이 다시 묻자 소린은 킬리의 검을 높은 찬장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그 아이가 ‘자기가 그랬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오. 두린의 자손들은 자신이 말하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소린-”
소린은 발린의 말에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묵묵히 입을 닫은 채 불쏘시개로 장작을 쑤시는 소린의 모습을 보며 발린은 한 숨을 내쉬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소린. 당신이 산 밑의 성을 되찾으면, 나중에 저 아이가 왕이 될 테니까요.”
◆
소린은 그의 조카 둘을 평등이 사랑했고, 난롯가에서는 서로를 나란히 앉혀 옛 왕국을 기리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가르침에는 서로 방식을 달리하였다.
◆
우중충하던 잿빛 구름이 다시 빗방울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더니 해가 질 무렵에는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필리는 그 동안 오늘 하루 시비가 튼 아이들의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사과를 했지만 아이들은 물론, 그들의 부모조차도 필리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 다들 문을 닫거나 필리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직 자기의 집 앞에 계속 서 있는 필리가 부담스럽던 한 아이의 아버지만이 필리의 사과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종이에 서명을 해줬을 뿐이었다. 사실 그 서명마저도 쏟아지는 장대비에 잉크는 번지고 종이는 지점토마냥 흐느적거렸다. 결국 필리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아이들의 집에도 방문을 허락받지 못해 주변만 서성였다. 붕대를 감은 손이 무거웠다. 비단 팔 뿐만이 아니었다. 온 몸이 무거운 추를 단 마냥 무거운 것이, 한 걸음을 걷는 것뿐인데도 피로가 몰려왔다. 필리는 눈앞에 점점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점점 필리의 앞으로 다가왔고, 어느 순간에서부터 필리는 그 그림자가 킬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킬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커다란 우산 하나를 들고 필리에게 조심히 다가왔다. 킬리는 필리의 눈치를 보며 우산을 씌어줬다. 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킬리가 결국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형, 내가 잘못했어. 필리는 한 팔로 어린 동생을 말없이 꼭 끌어안았다.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하늘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새까만 것이, 비는 오랫동안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했다.
◆
난롯가의 장작이 모두 새까맣게 타고 비가 잦아들었다. 어두운 집 안이 여명으로 밝아오기 시작할 때 킬리는 문을 조심히 열어 발소리를 죽이며 집으로 들어왔다. 집 안을 둘러보던 킬리는 그러다가 탁자 옆에 소린이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소린은 자신을 보고 굳어있는 킬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갔다 왔느냐? 방에 있으라 한 걸 잊었느냐?”
“그게...”
킬리가 말을 흘리며 소린의 눈치를 살폈다. 말해라. 소린은 엄격하게 말했지만 어제처럼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킬리는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필리와... 함께 있었어요. 비가 너무 와서 우산을 가져다 줘야 할 것 같아서요.”
킬리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소린을 쳐다보았다. 소린은 아무 말도 없이 킬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킬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일은 필리가 시킨 게 아니에요 소린. 제가 혼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깐 벌을 주려면 저를 벌하셔야 해요! 삼촌, 필리가 많이 아파요.”
“필리는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필리가 사과를 해도 용서해주지 않았어요. 저도 같이 했는데도 모두 서명을 해주지 않아서... 그래서 집에 들어 올 수가 없어 우선 소나무 숲에 있는 작은 동굴에 필리를 두고 왔어요. 소린, 필리가 열이 심해요. 팔도 계속 아프다고 하고요.”
“너는 그만 방에 들어가 쉬도록 해라.”
“소린!”
킬리가 소린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소린은 킬리를 바라봤다. 킬리는 다시 뒷걸음질 쳐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필리가 집에 들어올 수 있을 때 까지 자기도 들어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소린은 작게 한 숨을 내쉬며 킬리에게 다가갔다.
“필리는 내가 데려올 테니 방으로 가서 눈이라도 붙이려무나.”
그제야 킬리의 치켜 올라간 눈썹이 풀어졌다.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소린은 흠뻑 젖은 작은 조카를 안아 방으로 올라가서 새 옷을 내주고, 난롯가의 잿더미를 청소하고 새 장작을 꺼내 불을 붙였다. 차갑게 식은 방안이 불길의 그림자로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소린은 필리의 외투하나를 챙겨 집을 나섰다. 초봄을 맞이하는 아침이라기엔 보슬비는 차가웠고 공기는 칼날마냥 시렸다. 소린은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숲속의 작은 동굴에서는 사라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필리가 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에 시달려 본 적이 거의 없는 필리는, 자신의 무거운 몸이 뜨거운 물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른 킬리가 왔으면.’ 필리는 벌벌 떨며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발소리가 들리자 필리는 킬리의 겉옷을 덮은 채로 자리에 앉아 소리쳤다.
“킬리, 어떻게 됐어?”
그러나 필리의 눈앞에 나타난 건 킬리가 아니었다. 소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필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얼굴의 어딘가는 미안함이 어려 있기도 했다. 필리는 입을 다물고 소린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린은 필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필리의 양 뺨이 붉었다. 소린은 필리의 열을 재더니 필리에게 물었다.
“걸을 수 있겠느냐?”
“...네.”
필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첫 걸음을 땔 때 필리는 어지럼증을 느껴 비틀거렸다. 소린은 그대로 필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냥 업히는 게 낫겠구나.”
필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소린이 내 준 등에 섣불리 업히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소린, 아직 서명을 다 받지 못했는데요? 소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들은 네가 어떻게 사과를 해도 절대 서명을 해 줄 사람들이 아니다. 이제 그만 가자꾸나.”
그제야 필리는 소린의 등에 업혔다. 비가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필리는 피곤한 눈을 깜빡이며 지나가는 주변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그들의 냉담함과 소린의 넓은 등이, 그리고 비 오는 이 모든 풍경들이 서러워졌다.
◆
어머니 디스는 작은 우리를 무릎에 앉히시고 이야기를 해주셨지. 이야기는 이랬다네.
「아버지 아울레는 우리를 일곱 형틀에 넣어 만드셨는데
가장 먼저 그의 손으로 빚어진 난쟁이 두린은
우리, 긴 수염의 왕이시라
별빛으로 만든 왕관을 쓰셨지
왕관의 별빛은 안개산맥도 가릴 수 없는 영롱한 새벽 빛
우리는 그를 따라 산맥 아래 별빛이 흐르는 연못, 켈레드 자람으로
왕은 그 곳의 동굴을 왕국으로 만드셨네
보석과 황금으로 가득 찬 우리의 왕국 크하자둠을
첫 번째로 난 난쟁이는 그 곳의 왕이 되어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왕국에서 번영을 누렸다네
아주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네」
◆
하루가 더 지나서야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날이 개었다. 비 온 다음날이 항상 그렇듯이 공기는 쾌청했고 안개가 끼지 않아 날이 맑았다. 필리를 밤새 간호하던 킬리는 선잠을 자다 깨어, 곤히 잠든 형제를 깨우지 않게 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방을 나서 거실로 내려왔다. 마침 소린은 사냥 갈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화살 통에 화살을 채워 넣다 킬리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킬리를 쳐다보았다.
“필리는 괜찮으냐?”
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킬리의 양 손에는 물과 수건이 담긴 대야가 들려있었는데 소린은 그걸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킬리에게 물었다.
“혼자 몸을 쉬어도 괜찮을 것 같으냐?”
킬리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잘 되었구나. 소린은 탁자에 놓인 화살통과 활을 쳐다보다 킬리가 들고 있던 대야를 건네받으며 자신의 활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킬리에게 말했다.
“잠시 후에 발린이 필리를 돌보러 온다 했단다. 필리가 괜찮다면 나와 함께 가지 나가자꾸나. 너도 활을 만들 가지를 찾아야 한다고 저번에 말하지 않았느냐?”
킬리는 그 말에 눈을 반짝였다. 선잠을 자서 피곤할 법도 한데 킬리의 얼굴엔 생기가 감돌았다. 다만 킬리는 곤히 잠들어 있는 제 형제에 대한 걱정에 위층을 바라보며 잠시 갈등을 했다. 하지만 모든 사내아이들이 그러하듯, 동경과 열망에 대한 기회는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다. 결국 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드워프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소린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소린은 킬리를 다리가 짧고 갈기가 긴 조랑말에 킬리를 앉히고 말을 몰게 했다.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점점 길이는 높아지고 두께는 얇아졌는데, 킬리는 저런 나무로는 활을 만들 수가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소린은 그 표정이 필리에게 심한 벌을 내린 자신에게 화가 난거라는 생각을 했다. 킬리야. 소린은 킬리를 나지막이 불렀다.
“내가 네 형제에게 섭섭하게 굴었다고 생각하느냐?”
“네? 아뇨, 저는 그 것 때문에...”
킬리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소린은 다시 킬리의 이름을 불렀다. 네, 소린. 킬리가 대답했다.
“네 형은 왕이 될 것이란다.”
킬리는 소린의 말을 듣느라 말고삐를 서툴게 쥐었다가 말에서 거의 뻔했다. 다시 제대로 고삐를 쥔 킬리는 소린을 바라보며 소린의 말을 의아하게 여겼다. 킬리가 아는 왕은 어머니가 들려주거나, 삼촌이자 자신들의 지도자인 소린이 들려주는 영웅들의 이야기에나 나오는 자들이 아니던가? 킬리는 무예가 뛰어나고 형제와 삼촌을 잘 따르는 기특한 아이였지만, 왕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킬리는 결국 소린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왕이란 무엇입니까 소린? 소린은 잠시 고민하다 킬리에게 답하였다.
“왕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둘러보는 존재이지. 좁고 어두운 샛길 하나라도 놓쳐서는 아니 되고, 배고파하는 자, 고통에 신음하는 자, 한 명이라도 보지 못해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며 가장 많은 황금과 가장 커다란 성을 가진 자이나, 가진 만큼 마지막까지 잃지 않고 그것들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내 조부인 스로르와 내 아버지 스라인께서 우리의 옛 영광, 크하자둠을 사악한 고블린 무리의 손에 타락하도록 두지 않고 지켜내어 그들을 몰아냈듯이, 또한 내가 망국의 백성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할 우리 형제들을 이끌어 이 곳 청색산맥에 터를 일궈낸 것과 같이, 왕은 모든 걸 가지고 무엇 하나 버려서는 안 될 존재란다.”
그 말을 들은 킬리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고삐를 놓치고 말에서 떨어졌다. 소린은 황급히 자기가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린 뒤, 킬리를 일으켜 세워 안위를 걱정했다. 소린이 킬리를 부르기 무섭게 그의 어린 조카가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킬리는 말에서 떨어진 충격에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무릎이 까져 흘러져 피가 흐르는 사실은 알지도 못했는데, 킬리가 울음을 터트린 유일한 이유는 자기의 왕이 될 사람이자, 형제인 필리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소린, 제 형제는 나보다 손가락 한 마디만 간신히 클 뿐인데, 어찌 그런 힘든 일을 혼자 지고 갈 수 있나요?”
그 말을 들은 소린은 자신의 작은 조카를 기특히 생각했다. 킬리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소린은 자신처럼 검고 구불진 킬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했다. 평소에는 엄격하기만 한 소린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네 어머니 디스는 고통을 둘로 나눠 너희 둘을 형제로 만든 거란다. 필리가 모든 이들의 왕이 되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힘들어 할 때 그를 가장 가까이 도울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 그의 고통의 짐을 기꺼이 나눠 가질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어머니의 고통을 반으로 나눠 나온 형제밖에 없단다.”
그 말을 들은 킬리는 갑자기 부끄러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제야 제 무릎이 까져서 피가 흐른다는 걸 알아 챈 킬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린께서 말씀하신 것은, 형제가 힘들 때 오로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뿐이라는 건데, 정작 자신의 꼴은 말고삐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해 떨어진 덜떨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니! 킬리는 눈물을 뚝 그치고는 다시 말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이전보다도 능숙하게 말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린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둘은 한참동안 숲을 돌아다니며 노루 두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잡았다. 소린이 능숙하게 활시위를 잡아 당겨 사냥감을 맞추면, 킬리는 말에서 내려 그것들을 가져와 안장 뒤에 올려놓고, 능숙하게 노끈으로 묶어 흘러내리지 않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킬리는 자신의 작은 활을 만들 나무를 찾아다녔는데, 땅바닥에 떨어진 가지들은 너무 얇고 힘이 없었으며, 나무는 너무 높아 올라가질 못해 실망을 거듭했다. 그렇게 숲을 돌아다니던 킬리에게 그의 어머니 디스가 자신과 형제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나무를 휘감는 바람과 함께 갑작스레 다가왔다.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나자 킬리의 실망한 얼굴이 안개산맥 위로 떠오르는 태양만큼 밝아졌다. 킬리는 큰 소리로 소린에게 이렇게 물었다.
“삼촌, 우리의 첫 왕은 아울레께서 만든 첫 번째 자식인 두린이지요?”
“그렇지.”
소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킬리는 더욱 신이나 소린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크하자둠에서 아주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며 살다 아울레에게 돌아갔다면서요?”
“그렇지.”
“그렇다면 내 형제도 첫 번째로 태어나서 왕이 될 테니 아주 오래오래 살 수 있을까요?”
어린 조카의 말을 들은 소린은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흔들리는 눈 안에는 손아래 형제인 프레리와 누이동생 디스가 그의 기억속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형제는 이미 죽어 없고, 매일을 위태롭게 사는 제 누이의 현실을 어린 킬리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소린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불현듯 이 작고 어리기만 한 조카에게 불운한 미래가 손을 뻗어 오는 것을 느끼고는 킬리가 모르게 몸을 떨었다. 킬리는 삼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그의 형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우리의 왕국 에레보르를 되찾게 되면 나의 형제는 아주 오랫동안 그 곳에서 번영하며 살아야 하거늘, 그렇다면 아무도 그를 해하지 못하도록 내가 형제의 앞과 뒤를 모두 지켜야겠구나. 몸이 두 개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둘이 한참동안 다른 생각을 할 때였다. 당황한 사슴 한 마리가 수풀에서 뛰쳐나와 소린과 킬리를 지나쳐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먼저 정신을 차린 소린이 황급히 활을 잡고 통에 손을 가져갔는데, 화살통은 텅 비어있었다. 화살을 다 써버린 것이다. 사슴은 이미 저 멀리 뛰어가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소린이 그리 말하자 킬리는 사슴이 도망친 곳을 한참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것이 적이었다면 큰일 났을 거야. 활과, 화살로 가득 찬 화살 통이 항시 필요하겠어.’
◆
킬리와 필리의 집 앞에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심어져 있다.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미루나무는 작은 형제들이 가장 사랑하던 놀이터였다. 둘은 날이 밝고 따사로울 때 항상 나무를 타고 올라가 두꺼운 가지에 앉아 하늘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 저 멀리 동쪽에 있는 산 너머로 빛의 갈기를 달고 피어오르는 붉은 노을이 천천히 올라오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둘은 그 산이 바로 안개산맥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필리의 몸은 미루나무 가지에 앉을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거워졌는데, 아직 그보다 어린 킬리는 가지에 곧잘 올라가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리가 즐겨 앉던 가지가 부러질뻔 한 이후로 크게 낙심하여 다시는 미루나무에 올라가지 않자 킬리는 며칠 동안 그 가지에 앉아, 올라오지 않는 필리를 놀리다 지루해진 이후로는 필리와 마찬가지로 미루나무에 올라가지 않았다.
필리는 소린과 킬리가 사냥을 나가고도 한참 뒤에야 일어났는데, 이미 해는 중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필리는 어제보다는 몸이 한 결 나아진 것을 느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차갑게 식은 스프와 빵과 고기 몇 점만이 식탁에 놓여있었다.
“킬리? 소린?”
집 안은 조용했다. 필리는 홀로 탁자에 앉아 성한 손으로 포크를 쥐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다 먹고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자, 한동안 식탁에 앉아있던 필리는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날은 춥고, 몸은 나른했지만 머루나무 가지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은 따듯했다. 필리는 머루나무 가까이로 다가가 위를 쳐다봤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서 봄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때, 발린은 소린의 부탁으로 필리를 돌보러 필리의 집에 도착한 참이었는데 집 문을 열려는 순간 머루나무 옆에 서있는 필리를 발견하고 그를 불렀다.
“필리야, 몸이 힘든데 왜 밖에 나와 있느냐?”
“발린!”
발린을 발견한 필리가 소리쳐 외치자 발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랑 킬리가 항상 올라가던 나무로구나. 올라가고 싶으냐?”
“아니요, 이제 다 커서 올라가지도 못한다구요. 소린과 킬리가 어디 갔는지 아시나요?”
킬리가 집에 없니? 발린이 오히려 필리에게 되물었다. 필리가 고개를 저었다.
“소린께선 오늘 사냥을 간다 하셨는데 킬리는 모르겠구나. 아마 제 삼촌을 따라 나선 게 아니겠니?”
그 말을 들은 필리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뱃속에 나비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삼촌은 매일 킬리만 곁에 두시는구나. 필리의 하얀 이 사이로 킬리의 목소리가 작고 거칠게 흘러 나왔다. 발린이 인상 쓴 필리의 모습을 보고 안위를 걱정하자 필리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그만 들어가요 발린. 필리가 앞장 서 힘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발린은 필리의 뒷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그를 뒤좇았다.
소린과 킬리가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해는 청색산맥 바로 위에 떠 있었다. 소린이 말을 묶어두러 마구간에 간 동안 킬리는 소린이 머루나무 옆에 잠시 놔두고 간 사냥감을 지키고 있었다. 킬리는 필리가 아직도 자고 있는지를 쳐다볼 겸 아주 오랜만에 머루나무를 올라탔다. 킬리는 항상 필리의 뒤에 앉는 습관이 있었는데, 아주 어릴적 부터 소린이 킬리를 그렇게 가르쳐왔기 때문이었다. 킬리와 필리 모두 소린의 말씀과 가르침은 항상 옳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왔고, 무엇보다 필리의 뒤에 앉는 것은 킬리에게는 큰 기쁨과 즐거움이었다. 당연히 미루나무에 올라갔을 때도 킬리는 항상 필리의 뒤에 앉았었는데, 사실 킬리는 그의 형제와 나무에 나란히 올라가있을 때 하늘이나 나무 아래 풍경을 구경하는 것 보다, 산들바람에 흩날리던 필리의 금빛머리카락을 홀린 듯 바라보던 때가 더욱 많았다. 필리의 금빛 머리카락은 항상 형제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했고, 햇살에 반짝이며 비칠 때는 킬리가 머루나무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킬리는 머루나무 가지에 앉아 필리의 침대가 보이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필리는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베고 누워 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킬리는 소리쳐 필리를 부를까 생각을 하다가 소린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아래로 내려오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퍼뜩 고개를 들어 방금까지 앉아있던 가지를 쳐다보았다. 아, 저거면 충분하겠어. 킬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
필리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햇살에 환했던 천장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린과 킬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킬리의 반가운 목소리, 발린이 그들과 대화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생생했다. 킬리로구나, 어딜 갔다 왔니?, 삼촌과 함께 사냥이요. 노루 두 마리와 토끼를 잡았어요!, 필리가 방에 있단다. 아마 깨어있을 거다. 올라가보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킬리가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린과 발린이 담소를 나누는 소리를 뒤로 한 필리는 문가에 등을 돌려 누웠다. 킬리가 크게 방문을 열어젖히며 필리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필리는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하지만 머루나무에서 이미 필리가 깨있는 모습을 본 킬리는 필리의 침대로 올라와 필리를 흔들었다. 결국 필리가 별 수 없다는 듯 눈을 뜨며 볼멘소리로 물었다.
“왜 이리 소란이야? 뭔 일 있어?”
필리의 물음에 킬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삼촌께서 다음 드워프들끼리 가는 큰 사냥에 나도 가도 된다고 하셨어! 내가 드디어 활을 만들 나뭇가지를 구했거든! 소린께서 말하시길 내가 토끼 한두 마리 정도는 활로 잡을 수 있을 거라 하셨어! 내가 집단 사냥에 참여하는 가장 어린 드워프가 될 거래!”
“그래 좋겠다.”
필리는 킬리를 쳐다보지도 대꾸했다. 말에는 빈정기림이 녹아 있었다. 킬리는 눈길도 주지 않는 필리의 태도에 눈쌀을 찌푸렸다.
“반응이 그게 뭐야. 좀 더 같이 신나거나 기뻐하면 안 돼? 며칠 전 부터 계속 이상해 필리.”
필리는 킬리의 말을 못 들은 체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쯤 되니 심통이 나기 시작한 킬리는 필리의 베개를 뺏어버렸다. 필리는 몸을 훽 일으켜 킬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만 좀 해! 필리의 베개를 뺏고 깔깔거리던 킬리가 깜짝 놀라 필리를 쳐다봤다. 필리는 씩씩거리며 킬리가 들고 있는 베개를 다시 채가며 킬리를 침대에서 밀쳐냈다. 필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너는 맨날 소린께서 나한테 이러했다 저러했다 잘한 일만 늘어놓고, 소린이나 다른 사람들은 매번 네 얘기뿐이지. 그래, 네가 나보다 낫다는 건 나도 알아! 네가 더 민첩하고, 검술도 나보다 더 능하고, 활 솜씨는 따라올 드워프들이 거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삼촌이 항상 너만 예뻐하는 게 당연하지. 넌 용맹한 드워프 전사가 될 거니깐!”
“필리, 그건-”
필리의 말에 당황한 킬리는 고개를 저으며 필리에게 설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필리는 킬리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그동안 가슴속에서 형의 입장으로, 가족의 입장으로 하나 둘 쌓아두기만 했던 소외와 불안이 터져버린 강둑처럼 필리의 입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항상 삼촌이 너에게만 뭔가를 더 가르치셨지! 검술이나 궁술이나!”
“그건 이유가 있어서 소린께서 그리 가르치신 거야.”
“나도 잘 알고 있어! 너도 내가 왕이 되는 것보다 네가 왕이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 넌 머리색마저 소린처럼 검은 색이잖아!”
“필리! 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
결국 킬리가 소리를 빽하니 내질렀다. 그래? 필리는 씩씩거리며 킬리를 노려보다 킬리에게 베개를 던지며 말했다.
“하지만 소린은 나 같은 것 보단 네가 왕이 되기를 원하실걸!”
킬리의 얼굴을 맞힌 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문 앞에는 어느새 둘의 높아진 언성에 달려온 소린과 발린이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필리! 이게 무슨 일이냐?”
발린이 방 안으로 들어와 가만히 서있는 킬리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킬리는 필리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한 동안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필리만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당혹감을 띄던 킬리의 얼굴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그 것은 화를 내려고 입술을 비튼 것도 아니었고, 소리 내어 울려고 얼굴을 일그러트린 것도 아니었다. 킬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 얼굴은 소리 없이 필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더 나았을걸. 필리는 킬리의 차가운 눈빛에서, 꾹 다문 작은 입술에서 소린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야 말로 필리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킬리는 한참을 말없이 필리를 노려보다 작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야. 형은 아무것도 몰라. 네가 틀렸어 필리.”
넌 멍청이야. 킬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이고는 발린의 손을 쳐내고 재빨리 방을 나갔다. 킬리는 계단에서 구르듯 내려가 그대로 집을 나섰다. 소린과 발린은 킬리가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려 침대에서 이불을 꽉 쥐고 있는 필리를 바라보았다. 필리는 킬리와, 킬리에게 겁에 질린 자신 모두에게 화가 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불을 쥔 왼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발린은 필리에게 다가가려 했는데, 소린이 그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그만 밖으로 나가지. 소린은 뭐라 말을 하려는 발린을 억지로 잡아끌며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방이 다시 어두워졌다. 필리는 얼굴을 들어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적막이다. 필리는 눈을 꽉 감았다. 아직 다 새어 나오지 못한 필리의 분노가 감긴 눈 사이로 빠져나와 흘러내렸다.
◆
집 밖을 나선 킬리가 향한 곳은 마을 근처에 있는 숲 속이었다. 나무 밑동에 앉은 킬리는 작은 조각칼을 들고 모아둔 나뭇가지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킬리의 옆에는 서툴지만 나름 정성을 들여 깎아 만든 화살이 아직 마모를 하지 않아 울퉁불퉁한 화살 통 안에 들어 있었다. 킬리는 말없이 손에 든 나뭇가지를 조각했다. ‘사각사각’하는 나무 깎는 소리만이 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끝 촉이 날카로운 나무 화살 하나가 킬리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킬리는 무성의 하게 화살을 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또 다른 나뭇가지를 손에 쥐는 가 싶더니 손에 든 조각칼과 나뭇가지를 앞으로 힘껏 던져버렸다. 바보.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숲속으로 향하는 공터에 드워프들이 모여들었다. 장작더미에 불을 피우고 앉은 그들은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하늘에 별과 달만이 빛을 내기 시작하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 져가던 그들의 영광을 찬사하는 노래부터, 전투에서 전사한 용맹한 전우를 그리는 노래, 그리고 그들의 고향을 되찾겠다는 굳은 다짐을 노래하였다. 소린은 그들 사이에 앉아 하프를 켰는데 맑고 슬픈 선율이 바람에 휘날리는 불씨들과 함께 어두운 밤하늘로 흩어졌다. 그 중 드워프 하나는 눈앞의 숲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숲속에서 작은 남자아이 하나가 나오자 재빨리 소린을 불렀다.
“소린, 저기를 보십시오.”
소린은 그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어린 남자아이는 다름 아닌 킬리였다. 킬리는 힘없이 숲길을 걸어 나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작게 난 길로 재빨리 사라졌다. 소린은 킬리가 어디를 가는 지 단숨에 알아챘다. 킬리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던 또 다른 드워프가 소린에게 말했다.
“소린, 킬리를 데려올까요?”
“내가 데려오겠네.”
소린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른 드워프에게 자신의 하프를 건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킬리가 향한 작은 숲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빠른 보폭으로 걷다보니 킬리의 인형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린은 그때부터 발소리를 죽이고, 간격을 두어 킬리를 좇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 작은 동굴이 나왔다. 소린은 걸음을 멈추고 동굴로 들어간 킬리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동굴에서 환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소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동굴 앞까지 다가갔다. 킬리. 소린이 킬리를 부르자 놀란 킬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린?”
“내가 들어가도 되겠느냐?”
킬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킬리가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을 하자 소린은 동굴로 들어가 킬리의 옆에 앉았다. 소린이 앉은 반대편에는 킬리가 만든 투박한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화살을 만들고 남은 나뭇가지로 킬리는 작은 모닥불을 만들었지만 동굴 안은 춥고, 바닥은 차가웠다. 소린이 킬리에게 말했다.
“바닥이 차구나. 밤의 숲은 아무리 불을 지펴도 흙마저 차갑게 변하지. 이 정도 불로는 추위를 이길 수가 없을 거다. 잠이 안 오면 저쪽의 커다란 불가로 가서 함께 몸을 녹이자꾸나. 네가 좋아하는 선조들의 얘기를 해주마.”
“오늘은 듣고 싶지 않아요.”
킬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소린은 가만히 킬리를 바라보았다. 킬리는 양 무릎을 끌어안더니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릎사이로 킬리의 화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린, 필리는 내가 왕이 될 거라며 소리를 질렀어요. 자기가 아니고요. 나만 소린에게 사랑을 받는대요. 소린도 제가 왕이 되길 원한다고 했어요. 정말인가요?”
소린은 킬리의 검은 머리를 매만지며 되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킬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무릎 사이로 고개를 살짝 들어 답했다.
“저는 삼촌이랑 머리색도 똑같고 활도 소린만큼 잘 쏴요. 필리보다는 제가 소 린을 닮은 게 맞죠?”
“그래서 네가 왕이 되고 싶다는 것이냐?”
킬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얼굴을 무릎에 파묻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작아져서 말을 하기 보다는 웅얼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린은 킬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어린 조카가 하는 말 하나도 허투로 넘기지 않았다.
“소린께서 왕은 킬리가 돼야 한다 하셨잖아요. 삼촌 말이 맞아요. 필리가 왕이 되어야 해요. 나는 머리가 황금빛인 드워프가 내 왕이 돼주었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필리 말이에요. 그런데 삼촌은 왜 저에게만 활과 검을 잡게 하시나요? 소린은 필리가 왕이 되는 걸 원치 않으신가요?”
그 말을 들은 소린은 고개를 저었다.
“킬리야. 내가 저번에 너에게 뭐라 말 했느냐?”
“필리가 왕이 된다 하셨어요. 왕은 가장 높은 곳에서 모두를 바라보고 품어야 하는 사람이라 하셨어요. 필리 혼자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니 형제인 제가 도와야 한다고요.”
전부 기억하다니 기특하구나. 소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킬리에게 말했다. 킬리를 바라보는 소린의 눈에는 그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네 말이 맞다. 그 말을 들은 킬리가 눈만 내밀어 소린을 바라보았다. 소린은 킬리를 향해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킬리야. 왕이 해야 하는 일들은 단지 활과 검을 잘 다룬다고 해서 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물론 그가 너 만한 재능이 있었다면 그마저도 능숙한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능숙하지 않으니-”
“제가 필리를 대신해서 싸우는 거죠.”
킬리가 소린의 말을 이어 말했다. 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다만 네가 왕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 역시 왕이 될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원하지 않는걸요.”
“그래.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검과 활 쏘는 법을 가르친 거란다. 또, 네가 언제 필리의 앞에서고, 언제는 필리의 뒤에 서야하는지를 가르친 거지. 필리, 그 아이는 준비가 되었을 때 너와는 다르게 검을 잡는 법을 다시 배울 것이란다. 킬리야, 저번에도 내가 너에게 말했지만 네 형은 내 뒤를 이어 왕이 될 거란다.”
킬리는 그제야 작게 웃었다. 소린? 킬리가 작은 목소리로 소린을 불렀다. 소린은 킬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필리가 많이 화났을까요?”
“네 형도 너에게 미안해하고 있을 거다. 네가 오지 않아 걱정도 하고 있겠지.”
킬리가 소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필리와 화해하고 싶어요. 킬리의 뺨 아래로 눈물 한 방울이 땅으로 떨어졌다.
◆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다. 우리의 어린 드워프 형제들이 좀 더 자란 뒤에, 그들은 자신들의 성을 찾겠노라 다짐을 하고 소린의 부름에 따라 긴 여행길에 올랐다. 물론 소린은 아직도 어린 두 조카를 이 위험한 여정에 참여시켜야 하는가를 고심했었는데, 소린의 원정대에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젊은이들의 눈과, 건강한 체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둘만큼 적합한 자들이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여정이 실패할리가 없다는 확신 하에 소린은 결국 자신의 어린 두 조카의 이름을 자신의 원정대에 기록하였다. 둘은 기쁜 마음으로 소린의 부름을 받았다. 킬리에게는 이 일이 얼마나 신이 났냐면, 에레보르에 돌아간 뒤 그의 삼촌이 금색의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매일 마다 그렸다. 그리고 나중에 그의 뒤를 이어, 왕좌만큼이나 밝은 금빛머리를 한 그의 형제가 왕이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킬리는 아주 어릴적 부터 자신의 형제를 종종 “황금빛”이라고 표현하곤 했는데, 필리만큼은 킬리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그들이 여행길에 오른 뒤에, 하늘은 높고 시야는 확 트여 위험하지 않은 날이 있었다. 둘은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여명과 사라지는 별빛 사이를 흘러가는 실구름을 바라보며 미루나무에서의 정답던 날을 기억했다. 이 때의 킬리는 성미가 급해서, 필리보다 만사에 쉽게 지루해졌기 때문에 먼저 들었던 고개를 내리고 필리의 금빛머리를 정성스레 따주기 시작했다. 필리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킬리의 손길을 느끼며 좀 더 하늘을 바라보다 킬리에게 말했다.
“에레보르에는 크고 단단한 나무들이 많다고 소린께서 그러셨어.”
킬리는 대답했다. 나도 들었다고.
“그 곳엔 다 큰 우리들도 앉을 수 있는 튼튼한 가지가 있는 나무들이 많을까?”
킬리는 머리를 땋느라 부지런히 놀리던 손을 잠시 쉬고 생각했다.
“글쎄, 그곳엔 뭐든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린 다시 한 번 미루나무에 올라가서 하늘과 땅을 내려다볼 수 있겠네. 이번에는 진짜 안개산맥에서 올라오는 해도 볼 수 있을 테고.”
킬리와 필리는 천문과 지리에는 많은 지식이 없어 그들이 이미 안개산맥보다 동쪽에 와있는 사실을 잊고는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해는 동쪽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 안개산맥을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이 훨씬 더 그럴 듯 했다. 둘에게는 절대로 바뀌거나 없어져서는 안 될 고질적인 신념 몇 개가 있었는데 안개산맥으로 해가 떠오르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킬리에게는 필리는 갖고 있지 않은 신념이 몇 개 더 있었는데 사실 이는 모두 그의 형제를 향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필리가-
“그리고 우리는 성 안에 의자를 세 개 만드는 거야. 하나는 우리의 왕이신 소린께서 앉는 의자로 가장 높은 곳에 만들고, 두 개는 양 옆에 나란히 만드는 거지. 너랑 내가 앉을 의자 말이야.”
-라고 아무런 생각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말을 꺼낼 때, 질겁해서 고개를 젓는 것이 그러했다. 그건 안 돼 필리. 킬리가 단호히 말했다. 왜 안 되는데?
“우리가 가만히 서있거나 앉아있을 땐 내가 항상 네 뒤에 있어야해. 너는 왕이 될 거니깐.”
“이 미련한 동생이 또 그런 소리를 하네. 그냥 우리 둘이 같이 왕을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요.”
킬리는 한 숨을 내쉬고 황금빛 머리카락이 미풍에 흩날리는 필리의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보다 알밤을 먹였다. 왜 때리는데? 성을 내며 뒤를 돌아보려는 필리의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놓고 킬리는 다시 필리의 머리를 땋으며 말했다.
“소린께서는 형이 왕이 되어야 한댔어. 그러니깐 왕은 내가 아니라 형이야.”
그 말에 필리는 작게 한 숨을 내쉬더니, 작게 웃기 시작했다. 킬리는 그 웃음이 자신을 비웃는 건 줄 알고 왜 웃느냐며 언성을 높여 필리에게 말했다. 필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킬리를 도닥였다. 필리가 웃은 이유는 아주 어릴 적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필리가 생각이 난 어릴 적의 일은, 킬리와 필리가 싸웠던 그 날 밤이었다. 킬리가 집을 나간 뒤, 얼마 있지 않아 소린과 발린 모두 필리를 혼자 두고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필리는 한참동안 혼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난로에선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고, 식탁위에 차려진 음식으로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화가 나 밖으로 뛰쳐나간 어린 동생이 들어오지 않자 걱정에 잠이 들 수 없었다. 필리는 난롯가에 앉아서 킬리의 빈 침대를 바라보다 가끔씩 일어나서 창문을 바라보거나, 집 앞을 서성이며 킬리가 오고 있지 않을까 확인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어두운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을 비울 수도 없어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은 다음, 다시 킬리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킬리가 잠 들 시간이 되어서도 들어오지 않자 필리는 더욱 초조해졌다. 아냐, 괜찮을 거야. 아마 소린이 찾으신 다음에 같이 데리고 있을 수도 있어(이 생각을 하자마자, 필리는 아주 잠시 동안 킬리를 기다리는 게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킬리와 소린 중 아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오죽하면 동생 걱정에 잠도 오지 않던 필리가 결국 살짝 살짝 고개를 숙이며 졸기 시작할 정도였다. 마침내 자정을 넘겨서야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필리가 문소리에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지금 시간이 몇 신줄 알고-”
필리는 소리를 지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킬리가 아닌 소린인 걸 확인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을 꾹 닫아버렸다. 소린의 등에는 잠이 든 킬리가 업혀있었다. 필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면서도 소린의 눈치를 살피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필리는 발뒤꿈치에 침대 다리가 닿자, 그제야 뒷걸음질을 멈추고 소린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했다. 소린은 잠든 킬리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에 필리에게 다가왔다.
“아직 잠이 오지 않는다면, 잠시 얘기를 할 수 있겠느냐?”
필리는 잠이 확 달아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린은 필리가 침대에 걸터앉자 필리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필리를 마주보며 물었다.
“킬리가 말하기를 - 네가 킬리보고 왕이 되고 싶은 게 아니냐고 성을 냈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필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곁눈질로 잠든 킬리를 흘겨보았다. 두고 보자 킬리! 필리는 속으로 이를 갈다 소린이 자신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답을했다.
“저는 왕이 될 자격이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소린이 빠르게 되물었다. 킬리는 다시 잠든 킬리를 바라보다 소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건...
“킬리가 소린을 닮았으니까요.”
필리의 가슴속에서 뾰족한 압정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 압정은 필리의 속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린은 필리에게 한 숨 돌릴 시간조차 주지 않고 필리의 말을 다시 되 물었다.
“왜 나를 닮은 점이 왕이 될 자격이 있는 거지?”
“그야...”
필리는 잠시간 뒷말을 꺼내지 못했다. 소린께서 우리의 왕이 시니까요. 필리가 어렵게 꺼낸 그 말에 소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소린이 부정하자 필리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소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린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어린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이 아니다. 단지 이곳저곳을 떠돌다 간신히 터를 잡은 망국의 왕자일 뿐이다. 내가 왕이 되는 것은 내 왕국을 되찾아 왕좌에 앉는 그 순간이다. 그 왕자는 내가 앉은 적이 없었단다 필리야. 그 왕좌는 내 조부이신 스로르께서 앉았던 자리지. 산 밑의 왕, 스로르께서는 금빛 머리를 가지고 계셨단다. 나나 킬리같은 검은색 머리가 아니고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왕은 그랬단다. 그는 활에도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지. 다른 드워프들이 그러하듯이 말이야.”
필리는 소린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필리는 소린이야 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필리는 다급하게 소린에게 말했다.
“하지만 왕국을 되찾으면 소린께서 왕이 되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소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필리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소린은 그런 필리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아주 한 순간, 그 미소에는 슬픔이 언뜻 내비쳤지만 필리는 보지 못했다. 소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왕관은 너에게로 온전히 돌아갈 것이다. 내 조부와, 또한 내 누이동생인 디스의 머리를 가진 금빛 머리카락의 너에게 말이다 필리.”
소린이 그렇게 말하자 필리는 조금 당황했는지 소린의 시선을 피했다.
“저는... 저는 소린이 절 별로 안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필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소린의 말에 솔직하게 답했다.
“삼촌께서... 킬리만 좋아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왕이 되는 이유는 단지 제가 첫째라서 그런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소린, 제가 맞지 않나요? 만약에 킬리가 내 형이었다면 왕은 킬리가 되었겠지요?”
“아마도.”
소린은 이번에도 부정하지 않았다. 역시나. 필리는 소린의 대답에 입술을 깨물며 실망했다. 하지만 소린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란다. 소린이 이렇게 말하자 필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린을 쳐다보았다. 소린은 의자에서 일어나 필리의 옆에 앉아 숨을 가다듬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지금의 청색산맥에 세워졌던 거대하고 아름다운 드워프들의 왕국, 벨레고스트와 노그로드에 대한 이야기였다. 필리는 소린의 이야기에 어느새 빠져들기 시작해서 소린이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이전까지 자신들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윽고 소린의 이야기가 끝나고, 소린은 다시 필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이라는 것은 단지 첫째만이 되는 게 아니란다. 아울레가 빚은 드워프들 중 두린만이 왕이 된 것은 아니었지. 방금 들었던 훌륭한 드워프들의 왕국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그들은 첫째가 아닌 드워프들이 왕이 되어 만든 왕국이었잖느냐. 그리고 필리야. 왕이 된다는 건 어떤 능력이나 덕목을 지녀야만 되는 것만은 아니란다.”
필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것이 무어냐고 소린에게 물었다. 소린은 잠시 고민을 하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왕이 되는 거란다. 모든 왕들이 어질고 훌륭하기만 했다면 폭군이란 단어는 왜 있었고, 인간들의 역사에 왜 백성들이 왕의 통치로 고통 받는 시기가 기록되었겠느냐? 모든 왕들에게는 장점만큼의 단점이 있는 것이다. 네가 검술이 서툴다고 왕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면 이젠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 지 알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모든 왕들에게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들의 왕좌를 노린 자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이란다. 아무리 어질고 재능이 뛰어났던 자들 중 왕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필리야, 나는 네가 훗날 에레보르의 왕이 되었을 때, 저번에 네 동생을 감싼 것처럼 네가 어질고 훌륭한 왕이 될 거라고 믿을 뿐이란다. 그리고 너는 오랫동안 우리의 왕국을 부유하고 평화롭게 다스리겠지.”
소린의 말을 들은 필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바보 같고 창피한 생각인지를 깨달았다. 소린은 필리를 다독이며 마저 말을 이었다.
“킬리가 활을 쥐고 왜 네가 아닌 다른 것들을 겨냥하며 네 옆에 서있는지를 기억해라, 필리. 그 아이는 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도록 너를 지키려고 할 거다. 그렇게 살아남아 네가 왕이 된다면, 너는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킬리와 내가 가진 너에 대한 믿음이란다.”
결국 필리는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제가 잘못 했어요 소린. 필리의 울음소리에 잠들었던 킬리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필리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잠에서 막 깨어난 킬리는 서럽게 우는 제 형제의 모습에 동해 금방 제 형제를 따라 함께 울기 시작했다. 결국 소린은 그날 밤, 아주 늦게까지 어린 두 조카를 달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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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킬리는 쇠톱을 들고 하나를 가지고 올라가 필리가 즐겨 앉던 굵은 가지를 쳐냈다. 미루나무에서 좋았던 모든 기억들에게 작별을 고한 시간이었다. 킬리가 쳐낸 굵은 나뭇가지는 그가 만든 첫 번째 활이 되었는데, 가지는 부드럽고 잘 휘어져 둥글고 모양이 잘 빠진 활대가 되어 필리가 부러워했으나 약해서 금방 부러지고 말았다. 어릴 적 내 형제를 받쳐주어 너라면 우리가 자라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형제를 지켜줄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너무 자랐구나. 킬리는 섭섭해 하며 냇가에 그가 만든 첫 번째 활을 버렸다.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활을 만들어 등에 차고 다니고, 사냥을 하고, 마지막에는 부러져 버린 뒤에야 킬리는 주목나무로 정성스럽게 세공한 활을 만들 수 있었다. 킬리는 이 다섯 번째로 만든 활에 아무도 모르게 ‘키두젤-멜흐크(kidhuzel - melhekh)’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쿠즈둘로 그 뜻은 “황금의 왕”이었고, 이는 킬리만이 유일하게 알고 부르는 그의 형제를 일컫는 호칭이었다. 소린이 황금으로 뒤덮였던 에레보르의 성이야기를 할 때마다 킬리는 항상 필리의 머리카락을 쳐다보곤 했는데, 불빛에 물들어가는 필리의 금색 머리카락을 보며 딱 성안에 잠들어있는 황금이 저리 아름답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하기를- 우리가 그 산으로 돌아가 산 밑의 성을 차지한다면, 내 형제는 소린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그 모든 황금을 가진 왕이 되겠구나. 그의 머리카락처럼 빛나는 황금을. 그렇다면 그는 나에게 있어 황금의 왕이라 불러지는 게 마땅하겠지. 그렇게 킬리는 모든 난쟁이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 그러하듯이, 아주 비밀스럽게 필리를 황금의 왕이라 부르곤 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킬리와 소린의 믿음처럼, 필리가 에레보르의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를 가진 어질고 훌륭한 왕이 되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와 그의 형제는 다른 드워프들 보다도 재물에 대한 탐욕이 적었으며, 아주 현명하진 못했으나 용맹했고, 또한 모두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드워프의 역사를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결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린의 말대로 모든 어지고 훌륭한 자들이 왕이 되지는 않는다. 또한 왕이 되기를 바랐던 자들의 믿음을 일루바타르와 발라들이 항상 들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비극이던 희극이던 가운데 땅에 존재했던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겐 마지막이 있는 법. 이 이야기도, 황금빛 머리를 가진 젊은 왕자와 그의 가장 충실하고 친한 벗인 그의 형제에게도 마지막은 찾아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의 마지막은 황금색 왕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의 마지막을 여러분에게 좀 더 자세히 말해주고 싶다. 왜 황금빛 머리를 가진 우리의 젊은 드워프가 왕이 되지 못했는지를. 또한 그들이 왕으로 기록되진 못하였을지언정, 이들 역시 그들의 삼촌이었던 “참나무 방패 소린”과 같이 ‘산 아래의 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지막은 ‘다섯 군대의 전투’에서였다. 이 전투는 너무나 유명해서 이 땅의 아주 오랜 역사를 기록한 모든 책에 나와있기 때문에 따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이 험난한 전투에서 킬리는 고블린과 오르크들에 맞서면서 찔리고 베인 상처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킬리가 더욱 괴로웠던 건 자신의 옆에 서있는 필리역시 자신처럼 피를 흘리며 고통 받고 있는 사실 때문이었다. 내가 앞서서 내 형제와 삼촌을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구나. 킬리와 필리의 뒤에 서있는 소린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그는 간신히 검에 몸을 지탱하는 정도였는데, 사방에는 그들의 형제였던 드워프들과, 그들의 적이었던 고블린과 오르크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시체보다도 수많은 적들이 셋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킬리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화살이 떨어진 통과 그가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다섯번 째 활을 버리고 칼을 꺼내들었다. 킬리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 필리를 바라보고 서로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뜻은 이러했다.
‘내 뒤에 서 필리. 그러다 내가 쓰러지면 도망쳐서 몸을 숨겨.’
필리는 단박에 그 뜻을 알아채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킬리의 표정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필리의 뜻은 이러했다.
‘킬리, 나는 모두를 잃고 혼자 살아남아 왕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러자니 나는 차라리 너와 내 왕의 가족이자, 용맹한 전사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어. 내 왕은 아직 소린이시니까.
필리는 곧바로 킬리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몸은 어릴 적에 앓아누웠던 날들보다도 무겁고 고통스러웠지만 필리는 적들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때가 오고, 소린에게서 다시 배웠던 무예는 그를 용맹하게 만들었다. 킬리는 곧바로 그를 쫓아 달리며 소리쳤다. 필리, 이 멍청아! 싸울 때는 항상 내 뒤에 있으랬잖아! 필리가 무어라 대답을 하려던 순간에 적의 검이 필리의 몸 사이로 번쩍였다. 필리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킬리는 뛰던 걸 멈추고 필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킬리의 귀에서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필리의 목소리도, 자신의 외침조차 들리지가 않을 정도였다. 킬리는 겁에 질렸다. 겁에 질린 킬리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사실 이 습관은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형제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뒤에는 쓰러진 필리를 보며 오열하는 소린만이 있을 뿐이었다. 소린은 다시 검을 빼어들기 시작했다. 킬리는 그 모습을 좀 더 오래 기억하고자 눈을 감았다. 아, 우리의 왕이여. 킬리는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귓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 소음들을 떨쳐내기 위해 킬리는 그 보다도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소리들이 물러가고, 적들이 킬리에게 다가왔다. 적들의 발에 짓밟히는 필리의 금색 머리가 핏빛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킬리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울부짖음이었다. 나의 황금의 왕이여.
◆
마침내 전투가 끝이 났다.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하늘 위로 울려 퍼지고 해는 다른 날 보다도 일찍 떨어졌다. 늦은 밤에, 횃대를 들고 살아남은 드워프 군대들이 소린을 찾아냈다. 약하지만 소린의 숨소리를 들은 병사가 소린을 업었다. 소린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병사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간신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앞을 보라. 병사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킬리와 필리가 나란히 쓰러져 있었다. 병사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발린이 그들에게 달려와서는 두 형제를 보더니 눈을 감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 전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And if the night is burning
그리고 만약 밤이 타오른다면
I will cover my eyes
나는 내 눈을 감을 것 이오
For if the dark returns then
다시 어둠이 돌아와
My brothers will die
내 형제가 죽음에 들 수 있도록
-Ed Sheeran <I see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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