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BBC Sherlock/셜존] 런던의 하늘처럼(Like sky of a London)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존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의 몸을 감싸 안는 익숙지 않은 온기와, 욱신거리는 하복부, 게다가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
'대체 얼마나 퍼 마신거지?'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보자고 생각을 한 존은 무겁게 올려지는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자신의 팔에 달라붙던 무언가가 밑으로 '툭'하니 떨어진 것 같지만 지금으로썬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는 팔을 움직이기에 한층 수월했으니깐.
그러니깐 전날에 존은 사라와 함께였었다. 그녀의 침대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존은 사라에게 "당신만 괜찮다면 이곳에서 함께 지내보지 않을래요? 음..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죠. 만약 당신이 이곳에 오고 싶다면.. 이곳에는 당신이 누워서 밤을 보낼 수 있는 침대가 하나 있으니까요."라는 말을 들었다. 존은 아직은 이르다며 정중히 거절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 베이커가의 하숙집에서 셜록홈즈라는 이상한 동거인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상황이 썩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의 동거인의 태도에 약간 질려있었다. 최근 따라, 아니 정확히는 '그 사건'이후에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간단한 안부에도 짜증을 내기 일쑤였으며, 어떤 복잡한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현재 어떤 사건을 맡고 있다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자신이 귀찮은 존재인양 행동하고 있는 셜록의 태도에 그는 질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이 참에 그 징그러운 녀석과 이별을 고할 수도 있겠지.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인데 절대 나쁠 게 아니니깐.'
여자의 집에서 얹혀산다는 약간의 부끄러움만 감안한다면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직업도 있겠다, 같이 벌어가면서 생활을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짜증이 난다 해도 우선은)자신의 동거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인사만 고하고 나올 수도 없는 일이라 복잡한 감정을 안고서는 초저녁에 사라와 잠깐의 이별을 고하고 그의 하숙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때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호칭을 말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존은 자신이 아프간에 있었을 때 같은 참호에서 생활을 했던 제임스란 청년을 만났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제임스란 사내는 젊고 쾌활한 성격을 - 그러니깐 전쟁터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 가진 신병이었다. 존은 그를 이 넓은 런던의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해준 것에 퍽 기뻐하면서도 쾌활함이 사라진 초췌한 제임스의 안색을 걱정하며 그와 근처 펍으로 향했다. 그와 술잔을 나누면서 존은 제임스와 친했던 필립이 불운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 이럴 수가! 필립은 자신이 총을 맞고 제대가 결정이 나서 힘들어했을 때 많은 도움을 준 친구였는데...... 둘은 그의 죽음을 기리며 말없이 알코올을 자신들의 몸에 차곡차곡히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샤또를 주문했던 것이었다. 아니 마린이였나?
"안되겠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네……."
존은 손을 치우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익숙한 천장인 게 집은 제대로 들어왔나 보다. 내심 사라의 집으로 향하지 않은 것에 감사를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생각 외로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숙취가 심각한 게 보통 심각한 게 아니 구나라고 생각을 했던 그의 머릿속에 아주 짧은, 하지만 강렬했던 영상 하나가 지나갔다.
"어?"
잠깐, 방금 뭐였지? 방금 무슨 병신 같은 생각을 한 거야! 머릿속에서 안개가 걷어지는 맑은 느낌, 아니 오히려 너무 맑아져서 머리가 따가울 만큼의 고통에 존은 그제야 자신의 몸에 닿은 따듯한 온기의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과거의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전라의 상태였고 그의 옆에는
자신의 그 짜증나는 동거인이 자신을 안은 채로 잠들어있었다.
런던의 하늘처럼
(Like sky of a London)
BBC Sherlock "Johnlock" slash fan-fiction
written by Cielo in October. 2010
1.
"그래서 할 말은 없고?"
확실했다. 셜록은 절대 유례가 없을 행동을 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언제나 한마디를 받으면 열 마디로 반격을 행했던 전설의 셜록홈즈님이 아니셨던가! 하지만 지금 그 셜록홈즈님께서는 자신의 시선을 피한채로 입을 꾹 다물고 '모르쇠-'로 일괄처리를 하고 있었다. 그 행동을 10분을 넘게 보고 있자니 존은 메시지로 대화를 나눌까하고 진지하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 나는 아주 고주망태가 되어있었을거야. 그렇지? 나는 집에 오는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깐. 그러니깐 뭐라해야 하나. 그래 자네도 무슨 숨겨놓았던 양주를 마시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거나 그러겠지. 그렇지?"
"……."
"무슨 말 좀 해보라고! 하다못해 '술을 마시고 맛탱이가 간 건 자네 아니냐, 나는 지극히 정상 이였거든'이라고 네 특유의 비꼼이라도 해보라니깐?"
셜록은 계속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양새가 엄마에게 단지위에 있던 과자를 몰래 먹은 것을 들켜서 걱정을 하는 꼬마아이 같았다.
"그래, 아무 말도 안하겠다고. 좋아 이 개 같은 자식아."
존은 소파에서 일어날려 하다가 하복부에 칼을 찌른 것 같은 통증에 다시 주저앉아야만 했다. 이걸 도대체 어떤 감정이라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몰랐다. 사라와 사랑을 나누고 동거권유를 들었을 때가 하루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기억도 나지 않은 채로 남자랑 관계를 가졌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하지? 뭐 적당한 사전표현이 있을까? 숙취가 전혀 해소되지 않아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분노. 그래 난 저 개 같은 자식을 죽여버려야해. 존은 근처 테이블에 있는 먼지 쌓인 종이문서나 책을 셜록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너 진짜 나한테 할 말 없냐고 이 개새끼야!"
셜록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존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존의 분노어린 공격은 테이블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 그러니깐 마지막으로 400페이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두꺼운 책을 셜록의 이마를 향해 던진 뒤에-까지 계속되었다. 셜록의 이마는 마지막의 두꺼운 책으로 인해 찢어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던지 말든지, 존의 분노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테이블을 던지면 모를까, 계속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그는 셜록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나?"
정확히 저 개자식(현재 존은 자신의 뇌에서 그의 이름을 개자식으로 등록해 놓은 뒤였다)을 두들겨 깨운 뒤 27분이 지났을 때, 존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뭘 기억한다는 거지? 술에 찌들어있는 날 눕혀놓고 그렇고 그런짓한거? 오, 진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 뭡니까. 오히려 감사해야할걸. 내가 만약 온전히 다 기억하게 되었으면 난 네가 잡아서 감옥에 처넣는 그런 사람들 비슷한 게 돼 버렸을 테니깐 말이야!"
존의 거친 입김이 방 전체를 감싸버린 것 같았다. 여전히 셜록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저렇게 소리칠 거면 왜 말을 하라고 달달 볶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셜록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하긴 누구라도 존의 저 사람하나 죽이고 온 듯한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겠는가!) 다행히도 존은 거칠게 씩씩거리긴 했지만 저 불쌍한 남자의 말을 끊어먹고 욕설을 퍼부을 정도의 악한은 아니었다.
"자네가 동거를 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는 거야. 사라와 말일세."
"내가 그 얘기를 자네에게 했다고?"
"그렇지. 그리고 내 대답은 '좋다'는 것일세."
…….
"그게 전부야?"
"그러면 내가 더 할 말이 있어야 하나?"
"사랑하는 여자와 동거를 하겠습니다."라고 커밍아웃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의 말은 참으로 단순명쾌했다. 마치 한없는 자애로움을 베푸는 어머니와 같이 그의 동거를 허락해주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존은 더 이상 화를 낼 기력이 사라진 듯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야 이 개자식아 너 진짜 나한테 죽어보고 싶어?!!"
아래층에서 허드슨부인이 이 소란을 눈치 채고 급히 걸어와 말리지 않았으면 존은 정말로 셜록에게 테이블을 던졌을 것이다.
몇 시간 후에 존은 짐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셜록은 최근에 항상 그랬듯이 한마디 말도 없이 휑하니 어딘가로 나간 상태였다.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건 미친 짓이야. 어차피 자신에게 있는 물건도 많지 않았다. 몇 벌의 계절 옷과 여섯 권의 책, 노트북과 아스클레오피스의 지팡이가 그려진 자신의 머그컵, 그리고 한 자루의 리볼버가 전부였다. 존은 마지막으로 리볼버를 손에 쥐었을 때 돌연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두근두근, 심장박동이 스테레오 해드폰마냥 귓속에 울려 퍼졌다. 이곳에 있는 동안 솔직히 내가 느낀 스릴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잖아? 사라의 동거제안에 내내 갈등을 유발했던 목소리가 다시 꿈처럼 그의 뇌를 파고들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내가 지금 무슨짓을 당했는지 보라고."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잖아. 이곳에 있는 동안 너는 항상 전쟁터에 있게 되니깐.
"웃기고 있네."
애써 너 자신을 부정하지 마.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뭘. 뭘 알고 있다고? 한심한 소리군. 내가 미쳤거나 술이 덜깬게 확실하지. 나랑 대화를 나누고 말이지."
존의 머릿속에서 들려온 엉뚱한 목소리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이 났다는 걸 두려워 한 나머지 숨어버린 것 같았다. 존은 잠시 멈춰 있다가 짐을 마저 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 허드슨 부인도 나가있었다. 다행인 일이야,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엔 너무 정신이 없으니깐. 나중에 정중히 죄송하단 말과 함께 자신의 결심을 말하겠노라고 다짐한 존은 현관문을 조심히 열었다. 그러더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누구에게 얘기하는 듯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미 전쟁은 끝났어. 더 이상 나 같은 부상군인을 부르는 전쟁터가 없더라고. 여기서도 말이야.."
존은 다시 현관문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을 닫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고 있는 듯 했다.
2.
영국의 건물 곳곳에서는 "NO SMOKING"이란 팻말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여기 이 런던 도심 밖의 한적한 공원에서 벤치에 멀뚱히 앉아있는 남자에게는 그런 냉혈한 말을 건네기 보다는 담배 한 개비가 더욱 필요해 보이는 듯 했다(물론 아직까지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금하는 건 아니지만 불쌍한 이 남자의 주머니에는 담배가 들어있지 않았다). 막상 짐을 다 꾸렸다지만 존은 도저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라의 집? 세상에, 불과 반나절 전에 그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생각해보면 그의 존심과 염치를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굉장한 실례발언이 분명했다. 자신 몸의 거의 반 정도는 돼 보이는 커다란 여행가방과 단 둘이 있는 공원은 적막하고 쌀쌀했다. 처음 그가 이곳으로 왔을 때 그는 흥분으로 몸을 꿈틀거렸다가(그의 곁에 있었던 불쌍한 느릅나무 한그루는 그에게 폭력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만약 근처에 지나가던 공원 관리인이 없었다면 그 나무의 신변은 어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몰랐을 거다.)도 급하게 침울해지는 듯 그의 존재감에 의해 공원의 열기는 한층 뜨거웠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안정을 찾은 건지 아니면 그저 지쳐버린건지 이제 그는 단지 멍한 눈초리로 허공을 훑고 있었다.
'그리고 내 대답은 좋다는 것일세.'
세상에 만난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박테리아보다 못한 존재가 있냐라고 물을 때 존은 언제든지 '네 그것은 셜록홈즈라고 합니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기억마저 온전치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동거인을, 그것도 애인에 대한 언급을 하는 동거인을 멋대로 침대에 눕히고 관계를 맺은 이 버러지 같은 놈은 아침에 일어나서는 당연히 동거인에게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뻔뻔스러운 대답을 하는 사이코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도노반경사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 자식은 진짜 사이코패스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는 분노보다는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왜 요즘 그 자식은 날 피한 것일까.
무슨연유로 나와 섹스를 한 걸까
그러면서 사라와 동거를 하는 걸 반긴다는 건 또 무엇인가.
"도무지 모르겠네.."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일반인이 어떻게 알겠는가. 존은 처음부터 셜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겉 표면을 핥는 식이였지 그의 깊은 구석까지는 단 한 번도 도달한 적이 없었다. 이상하고 대부분이 짜증난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셜록 그 남자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닌 사내었다. 나 같은 일상의 지루함을 못이기는 자들을 끌어당기는 매력. 그리고 좋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관계를 이어나갔다고 생각했었다. 그 사건, 모리어티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 그 사건 전까지는. 모리어티, 그는 셜록의 사건 모든 것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 그가 왜 셜록에게 병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건지 존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셜록은 자신과 존이 거의 죽을 뻔했던 그와의 만남 뒤에 그를 이해한다고 존에게 나지막이 말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그런 놈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 우리는 심심하니깐. 나와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규칙과 룰에 진절머리를 치고 우리의 세상을 원하고 있어. 하지만 이 좁은 세상에서 우리 같은 사람은 놀만한 운동장이 없거든."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존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그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같은 천재들에게 이 세상은 지루함이 가득한 세계였을 것이다. 학구열을 가진 대학생에게 초등학교 수학문제만을 끊임없이 풀게 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런 논제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존과 셜록의 사이에 껴있었다. 그 사건이후 셜록은 존을 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을 조수로 채용해주지 않았다. 무슨 사건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지도 않았으며 존은 단순히 뉴스의 수많은 사건 중에 하나를 추측해보는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신이 있을 때 셜록은 말없이 집을 나서서 밤 늦게가 되서야 돌아오기 일쑤였고 다시 아침 일찍 나가기 일쑤였다. 애인이라도 생긴 거 아니냐라는 존의 우스갯소리에 심각히 정색을 한 점을 제외하고는 존에게 별다른 감정표현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 존은 염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와의 관계에 매력적이던 그의 동거인은 자신에게서 담을 쌓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게 하나하나씩 쌓여진 벽이 어느 샌가 그의 눈조차 볼 수없게 될 정도로 높아졌다.
'그런데 왜, 대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정말로 이 개 같은 자식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
존은 만약에 자신이 조금만 더 어리고 지성적인 면이 부족했다면 그는 진작 이 이해할 수 없는 난제에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정말로 울어버릴까?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지성적인 자식을 울게 하는 여유를 선물하진 않았다. 존의 등 뒤에서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왓슨? 왓슨 당신이에요?"
"엘라?"
짧은 머리의 건장한 흑인 여성이 약간은 놀랍다는 눈으로 존을 쳐다보았다. 존은 군대에서 제대를 한 뒤 심리적인 문제로 많은 고통을 야기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효과는 그리 좋진 못했다. 셜록과의 동거생활 이후로는 일방적으로 상담치료를 그만두었는데, 간만에 만나게 되니 약간은 기쁘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하고 괜스레 쑥스럽기도 했다.
"여기서 뭣하고 계시는 거예요? 갑자기 치료를 그만 하겠다고 전화를 하더니, 그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당신은 지금.. 당신의 반만 한 여행 가방을 들고 있네요."
"아.. 이건.."
존은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급하게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라는 존의 빠른 두뇌회전보다도 빠른 화제전환을 구사했다.
"존.. 당신 더 이상 다리를 절뚝이지 않는군요!"
"아, 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다보니가 아니에요. 이건 진짜 놀라운 일이라고요. 얘기를 듣고 싶네요. 많이 바쁘지 않으시다면야 근처에서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게 어떤가요?"
아니 저는.. 처음에 존은 정중히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담 전문의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상황에 대해(물론 약간의 포장과 거짓을 추가해야 갰지만)설명을 하고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다.
"어.. 좋아요. 그러도록 하죠."
솔직히 말해 엘라는 존에게 있어 상담의로는 최악의 상대였다. 하지만 내담자와 상담자의 관계를 떠나 안부를 묻고 식사를 하며 최근의 근황을 나누기에 있어 엘라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간단히 식사를 한 뒤 후식으로 홍차를 즐기면서 느긋하게 대화를 즐겼다. 그녀와의 대화는 무언가 편한 느낌을 주었기에 존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불편함을 어깨에서 조금 덜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엘라는 종종 존의 블로그에 들려 그의 근황을 보고 있었다면서 꾸준히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죠?(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블로그활동이 뜸해졌더라고요 왜 그런 거죠?) 하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셜록이란 이름이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죠?"
"아, 예. 그렇겠죠."
제기랄! 존은 방금 전의 아주 짧은 느긋함을 다시 뺏긴 느낌을 받았다. 최근에 자신의 모든 불행을 가져다온 그 개자식의 이름을 듣자마자 전의 모든 걱정과 근심이 다시금 밀물처럼 그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혹시 크고 날씬한 몸매에 풍성한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는 아닌가요? 항상 정장을 입고 다니고.."
"그를 아시나요?"
"아, 역시나. 실은 최근에 조금 알게 되었지요."
설마.. 존은 애써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르며 조심히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 어떤 연유로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죄송해요.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역시나! 존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헛된 생각이 아니었다. 방금 엘라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도 아주 초보적인 실수를. 그녀도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담의는 자신의 환자에 대한 어떠한 정보라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셜록은 그녀에게 상담을 받고 있었다.
"엘라. 이게 굉장히 잘못되고 부도덕적인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걸 아시면 더 이상 저에게 물어보는 행동을 그만하셔야 해요."
한 번의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엘라는 마치 성벽 전체에 고루 기름을 부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존에게는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왜 셜록이 자신에게 니체의 철학론만큼이나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는지 알 수 있게 될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그는 급하게 일어나려는 엘라를 억지로 제자리에 앉힌 뒤에 손과 발이 닳도록 입으로 간청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요즘 그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를 당신이 아신다면 절대 그런 말은 할 수 없을거에요. 우리는 어떤 사소한 사건에 휘말렸었거든요. 사실 사소한건 절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그 뒤부터 그가 저에게 전에 대하던 행동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표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이 진짜 그 모습을 보셔야 해요. 저는 같은 한 방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하는 공동세입자에 이상행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자격이 있어요."
"…….당신 이였군요."
"네?"
"아, 아니에요.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니었으니 신경 끄세요. 이건 그저 혼잣말이니까요."
전혀 아니올시다. 엘라는 다시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채고는 존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말이 자신의 실수회복과 경력에 절대 좋지 않을 거란 걸 예측하고 있었다. 존 역시 그녀가 꺼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오늘 아침에 한 달 치의 분노를 표하지 않았다면 그는 커다랗게 소리를 쳤었겠지만 다행히도 기력이 다한 존은 소리를 내지르는 대신에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을 하면서 그녀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저에 대해 언급한 게 있습니까?"
"당신도 의사니깐 더 이상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거 아시죠?"
"제발요. 그의 행동이 저 때문이라면 약간의 힌트정도는 눈감아 주셔야 합니다. 그의 행동 때문에 제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봤는지 아십니까? 게다가 오늘 같은 경우에는!"
아차, 큰일 날 뻔 했다. 존은 자신도 모르게 나올 뻔한 오늘의 수치를 간신히 목 뒤로 넘길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둘 사이에는 싸늘한 적막의 벽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엘라 자신을 향한 압박에서 약간의 숨통이 트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엘라에게 있어선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셜록이 당신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건가요?"
"뻔뻔하게 묻지 마시죠."
"제 내담자에게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사람때문에 피해를 받고 있다면 그의 증상개선이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요?"
"제가 계산하지요. 오늘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존은 자신의 커다란 여행 가방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카운터로 계산서를 들고 다가갔다. 하지만 자신의 지갑을 열어보고는 자신이 계산하겠다는 간 큰 행동을 후회해야만 했다.
3.
"원래 저는 이런 도움이 필요 없다 생각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이런 게 필요할리가 없지요. 이런 뻔한 접근법과 인지적인 치료법이라니.. 하!"
셜록은 자신 앞에 있는 흑인 여성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군요."라는 가벼운 긍정을 취할 뿐이었다. 셜록은 짧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 잠시간 침묵을 고집하다가 자기가 답답하다는 듯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아무래도 저에게……."
이건 말도 안 되는 거다. 셜록의 얼굴에 이건 말도 안 된다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엘라는 그저 그를 나긋이 쳐다볼 뿐이었다.
"…….후. 좋습니다. 아무래도 저에게 그러니깐.. 그..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감정이지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러니까. 제길! 이건 진짜 미친 짓이야. 난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셜록은 가벼운 신경적 발작을 일으킨 것 같았다. 엘라는 그저 셜록의 행동을 주시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그래. 이게 멍청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정말로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으니깐 이곳에 올 수 밖에 없었어. 알겠어요?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래요. 제가 어떤 이성(理性)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감정이지요?"
셜록은 작게 이를 갈았다.
"사랑이요! 아마 이게 이론적인 정황에 따르면 사랑이라는 감정이라 하더라고요."
".. 좋아요 셜록. 우선 이건 알아둬야 할 것 같아요. 사랑은 지극히 이성적인 감정중 하나에요."
"남자에게 말이에요!"
셜록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꽥 질러댔다. 엘라는 "그렇군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런 환자들을 만나는 것이 전혀 놀랍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상담의였다.
"당신이 틀렸어."
"..뭐가 말이죠?"
엘라는 항상 그렇듯이 다시 셜록의 인사에 맞인사를 해 주었다. 처음의 상담을 이후로 엘라는 셜록이 다시는 자신의 상담을 오지 않거나 약속을 어기면서 계속 뒤로 미룰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꾸역꾸역 약속시간에 맞추어 상담을 하러 나왔고 그때마다 그는 인사대신에 "틀렸어"라고 있지도 않은 정의에 부정을 표해왔다. 결국 엘라는 그의 '틀렸어'라는 한마디가 그의 혼란스런 감정을 내포하면서도 '내가 여기 왔습니다.'라는 인사치례같은 것이라 확정을 지었다. 꽤나 재미있는 남자다.
"전부 다. 세상에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상담의가 된 거지? 당신은 나를 만난 첫날에 사랑은 지극히 이성적인 감정이라 말했지만 당신이 틀렸어! 사랑은 하나의 질병 같은 존재야. 내가 하는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알아들었어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요!"
"그런가요? 좋아요. 그와의 관계에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요. 말씀해주시겠어요?"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요. 이건 하나의 질병 같은 거야. 마치…….마치 암같은거라고! 오늘 같은 사건만 해도 그래. 나는 그의 손목에 있던 할퀸 자국을 확인하지 않고 정신이 팔려있었지. 내가 만약 마지막까지 그 미친 듯한 감정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렸으면 다섯 명의 여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그 끔찍하고 사악한 악마에게 런던시내를 걸어 다니며 먹잇감을 찾을 수 있도록 허락 할 뻔했다고. 젠장!"
라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중얼거린 셜록은 곧 이어 정신을 차렸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을 받았다.
"오, 우리말입니까? 우리는 굉장히 좋습니다. 아무 일도 없거든요. 그냥 전적으로 나한테 피해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나한테 피해란 말입니다. 덕분에 오늘 모든 집중을 요해야 했던 사건을 해결하면서도 전적으로 나를 방해했어요. 알아요?"
"그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방금 말했잖습니까! 젠장! 내가 지금 무슨짓을 하는 건지."
셜록은 또다시 몇 가지 헛소리를 빠르게 읊어댄 뒤 어느 정도 침착함을 찾게 되자 좀 더 정중하게 엘라에게 말을 이었다.
"후, 톰슨. 항상 얘기하는 거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와의 관계를 개선한다던가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조언과 응원을 받으며 마음의 짐을 덜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빌어먹을 감정을 제 머릿속에서 영영 없애버리고 싶은 겁니다. 영원히요!"
사랑이란 감정에 무디고, 설령 그 사랑을 느껴도 그것에 젖어 행복감과 슬픔을 느끼기 보단, 그 감정을 증오하고 부담스럽고 수치감을 느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60억이 넘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에 대한 증오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적지 않을 거라 과감하게 추측을 해본다. 직장 상사와의 부적절한 관계, 헤이즐넛같이 달콤한 사랑을 하는 커플의 여자를 짝사랑하게 된 한 남성. 같은 동성에게 느끼는 야릇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 엘라의 앞에 앉아있는 불안하고 초조한 행동 속에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눈 안에 담은 이 사내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더라도 사랑이란 감정을 기존의 중력보다도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 사랑받는 법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서투른 것인지, 어느 쪽이 되었든 그는 사랑이란 감정은 자신에게 있어서 안 될 가장 무용지물한 감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왜 그 감정이 자신에게 무용지물 한 것인가는 셜록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 정말로 자신의 앞으로의 삶에서 필요가 없으며 방해만 될 것이라는 걸 예감을 해서일지도 모르고, 혹은 상대방에게 있어 자신의 감정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을 하고 있어 그 감정을 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번까지는 말이다.
그러니깐 존이 짐가방을 싸고 자신의 하숙집을 나온 뒤 런던외곽의 민박집에서 하루를 지새우고도 갈 곳이 없어 길포드까지 흘러들어갔을 때 셜록과 엘라는 상담약속이 잡혀있었다. 당연히 셜록은 어김없이 약속장소에 나타났고 엘라역시 셜록과 마주보며 앉아있었다. 하지만 셜록이 "틀렸어!"라는 인사를 하지 않으면서 엘라와 셜록은 오늘의 상담만큼이나 거북하고 어색한 상담이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셜록의 경우에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표현하려면 "죄송합니다. 항상 미루고 부정해왔던 감정이 폭발해버려서 제가 상대방을 덮쳐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말을 꺼내야 했으며, 엘라의 경우에는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당신이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 댁이 내 상담을 받고 있다 폭로를 해버렸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적어도 당신이 최소한의 양심이나 수치심, 자존심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약간의 거짓말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오직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양심으로 인해 자신의 치부를 상대방에게 말 하겠는가? 당신이 어떻게 생각을 할진 모르지만 이 똑똑한 두 남녀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확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숨기는 게 있으면 그 행동은 자신도 모르게 겉으로 표출되는 법이었다. 두 사람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너무 조심히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상담을 진행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혹여나 상대방이 쳐다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서로는 눈조차 마주칠 수가 없었다.
"좋아요. 요즘은 어떠세요?"
결국 상담사의 직업으로 면담 자를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는 엘라가 말을 꺼냈다.
"네. 좋습니다. 그럼요."
셜록은 경직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남자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색한 미소였다. 그 모습은 꽤나 괜찮았는데 아쉽게도 엘라는 그에게서 시선을 최대한 멀리하려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미소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셜록은 침통한 표정으로 모든 창피와 죄책감을 뒤로하고서라도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해야 하나 심각히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75파운드씩의 고상담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조금 있기도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결국 억제하지 못한 감정의 결과로 상대방-그러니깐 존-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이 일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와 나의 관계에 가장 접점선이 없는 타인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게 한층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이 당장이라도 터지지 않고서는 온 혈관을 꽉채운듯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뭐라 말해야 하지.
셜록의 눈동자는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소의 엘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엘라는 어제의 자신의 잘못에 모든 생각이 치우쳐있었다. 결국 셜록이 말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전까지 그녀는 셜록의 벅찬 감정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러니깐 엘라에게 말한 셜록의 사정은 이랬다.
"저는 고문탐정입니다. 세상하나밖에 없는 제가 만든 직업이죠. 하지만 그런 모든 상황을 뒤로하고 말하자면 저는 제 자신의 직업 때문에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많다는 겁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죠.(아, 미안해요.) 안 그래도 방금 제가 한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에도 수치스러움에 제 머리를 총으로 쏴버리고 싶단 말입니다! 알겠어요? 세상에 내가 어떻게 울 수가 있지. 이건.. 이건 진짜 말이 안 돼. 유치원시절에도 단 한 번도 울어본적이 없는 내가.. 그래요! 저 인격 장애 있어요. 그러니깐 그만좀 쳐다보라니깐요?('누가 그런 말 했답니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결국 그의 대화 모두를 알려줄 수 없음에 사과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의 불필요한 신경발작증세와 자기자랑을 제외하고 핵심을 말하자면 이랬다.(물론 대화도 매끄럽게 했고 그가 느끼고는 있지만 설명하지 못한 말을 조금 추가하긴 했다. 그러니깐 아래의 대화가 셜록이 곧이곧대로 말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는 처음부터 어떤 흥미와 매력을 끌던 사람 이였습니다. 자기감정에 솔직했고 무엇보다 저를 괴물 보듯이 하지 않았으니깐 요. 물론 제 이런 성격 때문에 몇몇 불만과 불화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누구보다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챙겨주었습니다. 이런 사이를 아마 친구사이라고 하겠죠.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아마 그때부터 싹텄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에서 저와 그 모두 위험에 쳐해있었죠. 전적으로 저 때문에 위험에 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저를 구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 경험은 처음 이였죠. 누가 나를 위해서 자신을 위험에 내던질 수가 있지? 그 상황은 전적으로 그에게 불리했고 그에게 위험했던 상황 이였음에도 저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저는 그저 잠시간의 안도의 상황에서 그에게 괜찮냐고 끊임없이 묻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요. 그 이후에 있던 모든 일을 뒤로하고 결국 둘은 가까스로 신체적으로 안전을 보장하게 되었고 아마 그때 처음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죠. 당연히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이였으며, 무엇보다 그날의 일로 알게 되었어요. 저랑 있으면 어떤 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아니 그 사람이 아니어도 저와 함께하는 이상 그는 항상 위험에 도사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항상 그런 상황에 놓여있었으며 그런 위험의 스릴을 즐기는 사람이지만, 저를 제외한 어느 누가 그런걸 원할 것이며 또 누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해서라도 위험에 쳐하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도 그러한 위험을 어느 정도 즐기는 사내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우리는 존이 군인 이였으며, 그 상황에서의 스릴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야한다). 결국 저는 그를 저의 전쟁터에 올 수 없도록 했습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 향한 저의 감정을 숨길 수 있었지요. 그와의 모든 접촉을 금지했습니다. 대화도 최소한으로 했고, 제 사건에 더 이상 그의 도움과 찬사를 바라지도 않았지요. 그가 뭐라도 길게 얘기를 하려하면 항상 자리를 피해왔습니다. 또 들어왔을 때 그가 침대에서 잠이라도 자고 있으면.. 저는 제 자신의 이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다시 집을 나가서 공원에서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항상 괴롭고 불편한 하루하루를 지속하게 되었고 그 직후부터 이곳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쳤을 때 셜록의 새하얀 얼굴은 홍당무만큼이나 붉어졌다. 수많은 가벼운 신경적발작과 워낙에 빠른 템포로 이야기 하는 바람에 그의 호흡은 꽤나 흐트러져 있었다. 만약에 거울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는 "도저히는 못하겠어! 이건 정말 못 말하겠다고!"라고 상담도중에 뛰쳐나갔을지도 몰랐겠지만 다행히도 그들이 있는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엘라는 이 불쌍한 사내를 쳐다보며 "많이 힘들었겠군요."라고 말하는 대신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셜록의 숨이 조금 고르게 되었을 때, 그는 한순간 말하기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저께밤이였습니다. 그가 잔뜩 취해서 들어오더라고요. 저는 언제나 그렇듯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가 저를 잡더니 진지한 얼굴로 저와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니 살짝 우는 것 같기도 했어요. 손아귀 힘이 워낙 센데다가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데 뭐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얘기를 듣기로 했죠. 가벼운 소파에 앉아서 최대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이야기를 들으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싸구려 양주냄세가 그의 몸을 타고 저의 코를 간지럽혔죠. 약간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를 두근거리는 심장과 하모니를 이루는 그 화합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죠. 하지만 대충 저에 대해서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렇게 몇 분간을 귀엽게 투정을 대더니 갑자기 말을 끊더라고요. 그때 잠시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주저하는 눈빛을 하더라고요. 젠장,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최대한의 침착성을 유지하고 힘겹게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할까하는 마음에 조바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더니 최대한 조심히 저에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실은, 오늘 사라에게 동거를 하는 게 어떤가 하는 제의를 받았다네. 솔직히 지금 자네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건데 나와의 생활을 별로 만족하는 거 같진 않더군.]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그가 더 이상 이곳에 없다고?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에 대답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를 보내면 더 이상 이런 생활은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저 자신만의 일에 집중 할 수 있게 되겠죠. 아주 가끔 그가 저를 찾아오거나 제가 그를 찾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다른 사람들처럼 나와의 만남을 꺼리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더 이상 그의 체온이나 흔적이 집에 남아있지 않게 되면 제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니깐 제가 그와의 대면을 피하긴 했지만 그를 부정하지는 못했다는 게 사실입니다. 그가 나간 뒤의 방에는 그의 흔적이 가득했지요. 그의 노트북, 그의 다른 개인적 물품. 냉장고에 하루라도 없으면 그가 견디지 못하는, 그가 마시다 남긴 우유라던가. 저는 솔직히 그런걸로 그와의 회피로 인한 불만의 상황에서도 일종의 위안을 느꼈나봅니다. 하지만 그가 이곳을 떠난다는 건.. 정말로 그 모든 게 사라진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가 저를 떠난다면 그는 더 이상 저로 인해 위험에 노출 될 일이 없어진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저는 그때 [좋네! 존. 둘의 사이가 잘 되기를 바라겠네.]라고 바로 대답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그에게서 풍겨지는 술내임에 이미 취해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었죠. 하지만 그 뒤로 그가 애처로운 듯이 외쳤습니다. [말해보게 셜록. 날 보고 말해봐. 내가 떠났으면 좋겠나? 이것으로 모두 끝내고 내가 그녀에게 가기를 바라나?] 그가 무슨의도로 그렇게 말했는지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다만 최소한의 이성이 돌아왔을 때 침대위에서 그가 내 아래에있다는걸 알게 되었죠."
"..그러니깐 그게.. 그.. 했다는 건가요?"
"아니요!..아니 네! 했습니다. 그래요 저랑 그랑 섹스 했다고요. 왜요 당신이 원하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러니깐……."
솔직히 셜록이 자신의 상태를 순순히 순응하고 상대방과의 관계가 개선이 되어서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존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마 그녀는 (그래서는 안되지만)남 몰래 존을 좋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상담이 필요 없다 했을 때 약간 가슴이 허해지긴 했었고, 어제 그를 만났을 때 그에 대한 반가움과 셜록이 사랑하는 상대임을 알았을 때 죄책감과 같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셜록의 엄청난 커밍아웃에 그녀는 그의 발언에 대해 수긍을 해야 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다만 어제 순간적으로 지나간 존의 복잡한 심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침투가 되었다. 아 그래서 그랬던 것이었군..
"뭐가 말이죠?"
그녀의 혼잣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던 모양이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셜록은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놓칠 리가 없었고, 그것은 그녀를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아뇨. 그러니깐 그.. 표정 말이에요"
엘라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물론 그녀는 그 표정의 대상을 존이라 말했던 것이었지만, 전날의 그녀와 존과의 사건을 모르는 셜록으로써는 자신의 표정을 말한 거라 생각하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다음날 깨어났을 때 가슴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한층 가벼워 진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는 저에게 엄청난 분노감을 표했지요. 아, 그게 나쁘거나 상처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게 오히려 저의 결정을 확실하게 했거든요."
존의 짐가방.. 그녀는 셜록의 대답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조심히 셜록에게 물어봤다.
"..그에게 뭐라고 말했나요?"
"당연히 그를 놓아줬지요. 더 이상은 그의 흔적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걸 잘 알게 되었으니까요."
셜록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자신에게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일종의 허무감이었다.
4.
[당신의 친구가 많이 아파요.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ET]
베이커가에서 나와 정처 없이 떠돌던 존이 길포드로 흘러들어가 여관에서 하루를 지새우고 9시가 넘어서야 부스스하게 일어났을 때었다. 이틀 전에 우연히 만났던 엘라에게서 뜬금없는 문자가 왔을 때 존은 그녀가 보낸 문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일분이 넘도록 머그잔을 멍하니 든 채로 문자에만 집중을 해야 했다. 친구라니? 누굴 말이지?
"아"
자신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셜록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존은 멍청히 있다가 머그컵을 떨어트렸다. 아직 열기가 가득한 커피가 테이블을 넘어 자신의 바짓단을 적셨을 때야 머릿속에서 알람이 울린 듯 벌떡 일어난 존은 급하게 바지를 털어내고 차가운 물로 커피를 쏟은 부위를 식히면서 잠시 동안 그 문자를 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바지를 갈아입고 방을 비우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 존은 다시 그 문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 해 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문자의 순수한 의미보다는 셜록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복잡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간신히 정리한 것 같았었는데 작은 반응에도 폭팔할듯이 들끓는 그의 생각에 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녀석은 친구도 뭣도 아닌데말이지. 그나저나 왜 이 여자는 오지랖이 넓은 거야
도무지 그녀석이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 후로 연락 한 번도 없이 말이야.
아니 연락 따위 안오는게 낫지. 뻔뻔하게 어디에 연락을 한다는 거야.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근데 대체 어디가 아프다는 거야?
[네 톰슨입니다.]
"엘라? 존이에요."
[아. 존 연락해주셨네요]
저녁이 되기까지 존은 한동안 정지되었던 사고가 다시 가동을 시작하면서 지난 시간동안 멍하게 있던 것에 반작용을 일으켰다. 결국에 머리가 평상시보다 더욱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바람에 존은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본래 예상대로라면 좀 더 나아가서 기차를 타고 맨체스터로 향해 대학교때 친했던 친구의 집을 방문해 며칠간 신세를 졌어야 했었지만, 결국 존은 그 계획을 잠시 보류해두고 엘라에게 전화를 하는 걸로 협상을 보았다(아무렴 자신을 엿 먹인-보통 엿 먹인 게 아니라 자기의 무언가를 산산조각을 내버린- 그 남자의 병든 얼굴에 축하한다고 팡파레라도울리고 싶은 괜한 오기가 작동한 것이라고 존은 스스로를 정당화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여러 가지로 말을 해줄 거란 믿음과는 반대로 그녀는 [아무래도 당신이 진찰해보시는게 어떨까 싶어서요. 의사잖아요. 친구사이신데 잠시 집에 들러서 상태라도 봐주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로 간략하게 '집에 나가서 네가 봐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나이도 있는데 아프면 알아서 병원을 가겠죠. 그리고 박사님 그녀석이랑 저는 친구 아닙니다."
[그래도 잘 아시잖아요. 안색이 안 좋아서 병원이라도 가보라 했는데 갈 생각을 안 하니깐 상담의로써 걱정이 되서 부탁을 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정말로 아프면 구급차나 불러주시는게 상담의로써 최선의 일이라 생각하는데요."
엘라에게 잘못이 있는 게 절대적으로 아니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존은 괜히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정말 이 여자는 갑자기 오지랖이 넓어진 거지? 왜 꺼림칙한 사이를 인식하지 않고 지 멋대로 나가는 건지! 존은 이대로 "수고하세요."라고 전화를 끊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 그녀에게 시기심과도 같은 감정이 든 존은 저도 모르게 전화기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가 무슨사정으로 당신과 상담을 하는지는 내 알바 아니지만, 괜히 저랑 그 사이에 간섭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이 셜록과 특별한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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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RRR]
런던은 오늘도 흐렸다. 얕은 소나기가 촉촉이 런던의 땅을 적시고 있었다. 셜록은 자신의 하숙집, 그러니깐 베이커가 221B번지의 소파에 누워있었다. 조명하나 없는 방은 뿌연먼지같은게 표면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는데 마치 19세기 말경 기계가 돌아가지 않을 때의 어둑한 공장을 연상케 했다. 그러한 방안에서 울려 퍼지는 핸드폰의 벨소리는 적막감을 더욱 고조시키게 했다. 하지만 셜록은 자신의 얼굴에 두 손을 포개어 있을 뿐 전화를 받겠다는 어떠한 작은 행위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누구에게 전화가 왔는지 슬쩍 보려하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전화가 간절한 몇몇 사람들은-특히 레스트레이드 경위- 애간장이 탈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의 셜록에게 그런 게 무슨상관이랴! 그의 머릿속은 더 이상 런던의 시내를 활보하고 다니는 사악한 악의 근원들이나 영국의 암암리에 악한 손길을 뻗고 있는 사악하고 온갖 기묘한 범죄를 향해 엔도르핀이 솟구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을 안 하자고 마음을 먹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야 겠다고 더욱 노력을 해봤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은 갑작스레 자신의 공간을 타고 들어온 알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의 침입에 과부하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의 뇌의 혼잡한 신경들을 지나 깊숙한 그의 의식 속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만약 셜록이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머릿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에게 열렬한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당사자임을 알았다면 어떤 행동을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힐끔거리며 발신자가 누구인지도 확인하려 하지 않는 그의 못된 심보로 인하여 자신이 원하지 않게 현실에서의 그 남자를 배척하고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짓을 한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이 된 건지 셜록은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다. 톰슨에게 자신의 모든 사정을 말해버린것? -자신의 속내를 전부 털어 내버린 셜록은 그 후에 잠시 얼굴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니면 자신이 결국 자제하지 못하고 존을 덮쳐버린것? 그것도 아니면 그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 것? 아니면 그와 친구가 되고 싶다 생각한 것? 아니면 그와 만나버린것?
"대체 알게 뭐야! 뭘 하던 이미 끝나버렸다고! 제기랄!"
셜록은 소파 근처에 있던 아무 물건이나 집어서 벽을 향해 강하게 던져버렸다.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울려 퍼지던 벨소리가 잠잠해졌다. 그가 물건을 맹렬하게 던진 벽면에는 그 옛적 자신이 화가 나면 버릇없이 벽에게 화풀이를 한 총알자국이 선명했다. 그때는 존이 자신의 행동을 향해 맹렬히 비난을 퍼붓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자신에게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관심을 보여줄 때었다. 이제는 그저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멍청한 벽만 남아있었다. 셜록은 쓴웃음을 한번 짓더니 다시 소파에 맥없이 누워버렸다.
나도 알아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나는 진짜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이야.
그에게 있어선 늘 있던 사람들 간의 관계였다. 물론 그 관계 간에 느끼는 감정은 처음 겪는 혼잡한 매력이 있었지만 그것도 곧 괜찮아 지리라. 곧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오히려 잘 된 건이라고 셜록은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어쩔 수 없어 했으며 결국 자신을 주체할 수 없자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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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음성 메시지를 남기기 원하신다면 ‘삐’소리가 끝난 뒤…….]
1분 넘게 울리던 착신 음이 갑작스럽게 수신불가를 알리자 존은 화를 내야 하나 걱정을 해야 하나 심각히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의 번호를 보고선 종료버튼을 누른 게 분명했다(그렇다면 가만둬선 안 되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성난 손가락으로 다시 셜록의 번호를 찍어 통화버튼을 눌렀을 때부터 내내 수신이 거부가 되자 마음에 조급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끝까지 사람을 엿 먹이려고 하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욕인들 어떠하리. 셜록이란 이 사내는 정말 자신을 엿 먹이는 존재임에 분명했다. 자신에게 잊지 못할 굴욕감을 선사해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애간장을 타게 하는데도 선수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존은 가장 화가 나있었다. 그에 비해서 자신은-
'아냐 그건 아니야!'
존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진짜 미친짓인게 분명하다고 존이 생각했을 때 '부르르'하는 진동이 손을 타고 넘어왔다. 사라에게서 전화였다. 그제야 존은 자신이 지난 3일간 사라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사라의 모든 걱정스런 문자와 연락을 무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손은 이미 종료버튼을 눌렀다 는걸 알게 된 그는 자신에게 적잖은 실망을 했다. 사라에게 느껴지는 죽을듯한 죄책감. 하지만 이러한 죄책감은 슬슬 자신을 타협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지금 자신은 셜록과 대화가 필요했다.
"후. 그래 나는 내 플렛메이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성급하게 열 내지 않기. 진짜 성급하게 열 내지 않기."
괴상한 플렛메이트와 석 달이 넘게 생활을 하다보면 그 괴상한 버릇의 일부를 모방하게 된다는 논문으로 누군가가 주제를 쓴다면 3일 만에 볼품없이 어기적거리며 221b번지의 문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 남자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말하고 싶다. 그의 공동세입자인 셜록홈즈는 본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걸 습관처럼 여기던 사내였었고 존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행동이 셜록의 행동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셜록 그런 행동을 흥미롭게 여기긴 했지만 절대 보기에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고 손잡이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존은 우연찮게 외출을 준비하던 허드슨 부인이 문을 열면서 그의 무자각 증상을 끝낼 수가 있었다.
"에구머니나! 왓슨박사님"
"허..허드슨부인"
"삼일동안 연락도 없이 어디 갔던 거예요?..웨일즈 지방이라도 갔다오신거에요? 짐이 산더미 만하네요."
"아, 그게……."
"다 큰 어른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웃긴 일이죠. 그나저나 셜록이 많이 걱정돼서 큰일이에요. 물론 저런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지만 그때는 왓슨박사님이 있었으니깐 요."
[당신의 친구가 많이 아파요]
존은 자신의 심장이 철렁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셜록은 사건을 해결한 뒤에 또 다른 자극이 없을 때마다 며칠간이고 한마디도 없이 침대나 소파에만 누워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엘라의 메세지때문일까 아니면 현재 셜록에게 반응하는 모든 감정이 민감해진 것일까, 그는 자신의 교감신경이 재빠르게 반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라도 정말 어딘가 심각히 아픈 거라면…….
"실례할게요."
존은 현관문에 자신의 짐가방을 내팽개친 채로("어머 왓슨박사님. 저한테 이거 들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도둑맞을 것 같으니 현관 안으로만 들여놓을게요.") 성큼성큼 그들이 함께 지내던 2층으로 올라갔다. 닫힌 문고리를 세게 비틀어보았지만 문은 단단히 잠겨있었다.
"열쇠가 어디 있을 텐데.. 젠장!"
그러고 보니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을 하고 테이블위에 멋대로 열쇠를 던져놓고 나왔었다. 존은 순간적인 어리석음을 한탄한 채 애꿎은 문고리만 거칠게 돌리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은 묵묵부답이었다. 허드슨부인이 그가 아직 있다는 투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존은 방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분명 불도 키지 않고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소파에나 누워있겠구만.
"...후. 좋아 셜록. 나일세 존."
묵묵부답. 존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주객전도된 입장이로군.. 피해자는 나인데 말이지.
"셜록. 잠깐 문 좀 열어보는 게 어때?"
"……."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깐 문 좀 열어줬음 좋겠는데."
"……."
문 너머에서 이 개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존은 쓴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좋아. 내 얼굴이 보기 싫다면 대답이라도 하지 그래? 최소한의 예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
"젠장 셜록, 대답이라도 해보라고!"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결국 가슴속 깊은 곳에서 존은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다시금 토해내기 시작했다. 온갖 욕지거리와 셜록에 대한 온갖 비하발언을 내뱉었지만 셜록은 역시나 '없습니다.'라는 침묵을 연출했다. 과연 이 말을 들으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존은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 자각도 못하는 상태에서 셜록의 반응을 알고 싶어 했다. 결국 이웃집에서 "무슨 일 있어요?"라는 짜증과 걱정스런 방문이 오기 전까지 존은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하지만 이웃집의 여자에게 현관문을 열어주며 "아무 일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이성까지는 되찾지 못하고 단지 침묵만을 유지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별말 없이 돌아가 주었다).
'그런 수치를 당하고도 왔는데 나는 겨우 이런 대접을 받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 건가?'
이제 존에게는 셜록에 대한 분노보다는 허탈감과 괴로움이 가슴을 메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뭐를 하더라도 그에게는 별게 아닌 일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날의 섹스라고 할지라도 사실 그에게는 별 의미 없는 행동 이였으리라.
"실은 너에게 거짓말 한 것이 있어. 그날의 모든 일이 기억안나는건 아니야. 솔직히 자네 얼굴을 보며 온갖 욕설을 다 뱉고 싶어 돌아온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날의 일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싶었네."
"……."
"솔직히 난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결국 모든 극단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을 한건 너였는데 생각해보면 모든 피해는 내가 받았단 말이야. 이해가 가나? 일말의 미안한 감정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행동하진 않겠지.. 그래 내 잘못이야. 위대하신 셜록홈즈님을 내가 항상 귀찮게 했던 거구만. 그냥 내가 있는 것 자체가 너에겐 불편감이었나보군."
"..."
"이봐 셜록. 나도 참을 만큼 참았고 이젠 나도 내 자신에 대해 너에게 흔들리지 않고 주체성을 확립할 시기가 온 것 같아. 너와 한집에서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굉장히 많이 너에게 영향을 받고 살아갔다고 생각했으니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존은 확신을 굳혔다. 이번에도 아니라면…….
"그러니깐 많은 시간은 주지 않겠네. 1분정도면 네가 충분히 생각하고 정의를 내리고 행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겠지. 1분 동안 네가 다시금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할 준비가 되었다면 이 문을 열게. 그럼 내가 문 안으로 들어가 너와 얘기를 나눌 거야. 하지만 만약 끝까지 자네가 나와 얘기하기를 원치않는다면 더 이상 나도 뭐라 하지는 않겠네."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잠시 후 강한 어조로 말을 덧붙었다. 그것이 셜록에게 전하는 경고였는지 아니면 자신 스스로에게 전하는 다짐 이였는지 그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대신 이 이후에 다시는 날 볼 수 없을 거야."
5.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자신을 감싸왔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네.'라고 생각하면서 존은 살며시 눈을 떴다. 창문너머의 하늘은 지독히도 어둡고 우중충했고 역시나 부슬부슬하게 비가 내렸다. 그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
자신의 뒷목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을 때 존은 자신이 나흘전과 같은 상황에 쳐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참 난처한 입장이로군.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비명을 지른다던가 셜록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그의 신체에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자신을 안고 있는 셜록의 팔을 자신에게서 슬며시 떼어놓고 가볍게 샤워를 한 후 옷을 차려입고는 외출준비를 했다.
"어딜 가는 건가?"
"아아.. 잠깐 밖엘 좀."
셜록은 별다른 말없이 침대위에서 지그시 존을 쳐다보았다. 한쪽팔로 머리를 괴고 즐거운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셜록을 존은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했다.
'아냐 지금 뭔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 내가 미쳐가나보군.'
존은 고개를 절래 절래 젓더니("뭐하는 건가?" 셜록이 흥미롭다는 듯이 존을 바라보았다.) "다녀올게"하고는 살며시 문을 닫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라고 할 때 옆에 자신의 짐가방과 접이식 우산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웃어야 되나 울어야 되나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는 존은 우산만 살며시 든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사실 존은 약속이 있거나 어디를 가야할 계획은 없었다. 아직은 셜록과 단 둘이 방안에 놓여있기가 뻘줌하다는게 그의 입장이었다. 한손에 우산을 들고 그는 천천히 런던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출근대가 지난 오전시간대라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괜스레 기분이 저하되는 그런 거리었다. 도심가로 나가볼까하고 생각을 하다가 이내 어깨를 한번 들썩이더니 그는 그냥 한적한 공원 쪽으로 발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니깐 지금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계속 해서 설명하자면 그 뒤의 일은 꽤나 극적이었다.
실은 셜록은 당연하게도 잠을 자거나 해서 존의 말을 못들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집중을 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과 그를 막는 유일한 벽인 문이 존에게 여섯 번이나 발길질을 당했다는 것까지 추리할 수 있었다(존은 왼쪽어깨가 아직 뻣뻣한 감이 있어서 손으로 격렬한 행위를 자제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런걸 제외하고도 주먹으로 친 것보다 더욱 둔탁하고 위협적인 소리가 났으니 당연히 발길질이겠지).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존은 다시 되돌아 갈 것이다. 지금 자신이 존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다니! 셜록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일을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감과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잘 넘기기만 한다면……. 지금 멍청한 자신의 상태를 잘 넘기기만 한다면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질지도 몰랐다. 아니 생각할 시간이 주어져서 뭐하겠다는 거지? 셜록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를 사라한테 보내줘야 한다. 내가 그를 원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이야. 하지만 셜록은 귀를 틀어막거나 문 앞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는 존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왕 갈 거면 좀 더 나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가주게. 적어도 나에게 좀 더나마 관심을 가져줘.'
셜록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저렇게 화를 내는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게 좋아. 하지만 눈을 감는 동시에 그의 성난 목소리도 라디오의 전원이 꺼진 것처럼 멈추어버렸다. 셜록은 자신이 눈을 감는 동시에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된 건지 아니면 존이 소리치는 꿈에서 깨어난 건지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야 했다.
"실은 너에게 거짓말 한 게 있어. 그날의 모든 일이 기억안나는건 아니야."
셜록은 문을 바라봤다. 어두운 문 너머로 존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침착해졌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전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는 또한 갑자기 말을 바꾸더니 자신에 의해 셜록자네가 불편했겠다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자신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심어놓았다. 그것은 절대 자신에게 있어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더니 그는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1분의 시간동안 문을 열지 말지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했다. 당연히 그는 문을 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아니 먹었었다.
"대신 이 이후에 다시는 날 볼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그 다음 셜록이 생각나는 것은 문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는 존의 얼굴이었다.
존의 입장으로 넘어간다면 그는 다시는 자신을 볼 수 없을거다라는 짓궂은 말을 내뱉은 지 10초도 되지 않아 거칠게 문을 열어버린 셜록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마 문을 열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렇게 빠르게 환영해줄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한 존은 눈만 껌뻑껌뻑 거릴 뿐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라이브 쇼를 한걸 전부 듣고 있었단 얘기로구먼. 얼굴이 붉어지고 거칠게 한마디나 쏘아줄까라고 생각했던 존은 셜록의 얼굴을 보고는 이내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잊어야만 했다. 먹지도 씻지도 않았는지 부스스한 얼굴엔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이 남자가 울었다고? 아이언메이든에 넣어놔도 피는 흘러도 눈물은 흘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 남자가?'
설마 자신 때문에 운건가? 하는 마음에 존은 괜스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야, 정말로 아파가지고 고통이 심해서 운 걸지도 모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아프면 저 남자가 울 수 있지? 췌장암 말기정도는 돼야 울지 않을까?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이 잠시 존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애써 현실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존은 잡다한 생각들을 하나하나 뇌의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은 뒤에 셜록을 쳐다보았다.
"셜록?"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스스로 지각하면서도 존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광경 목격하기'란 종목으로 기네스 보유자가 되지 않을 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자국이 선명한 셜록에 이어 이번에는 그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진귀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셜록은 존을 바라보면서 소리는 없지만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아마 한번이라도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존은 이전에 있어본적도 없을 뿐 아니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건 분명 셜록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래서 그 둘은 한동안 열린 문을 사이에 끼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는게 고작이었다. 어쩔 수 없네.. 결국 존이 주춤주춤하면서 셜록을 안아주면서 다독여줄 수밖에 없었고 그제야 두남자의 말없는 화해가 이루어졌다.
"가지 말게."
"뭐?"
어찌어찌 방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 각각의 소파에 앉아서 상대를 견제하기에 급급했었다. 그러다가 심신 적으로 진정이 된 듯한 셜록이 뚱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척 보기에도 골이 날대로 나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살짝 입을 삐죽거리는 게 귀여워보인다고 존은 생각했다.
"난 제멋대로고 반사회성장애까지 있는 멍청이일세. 그래 천재긴 하지만 멍청이지. 제길 내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라고 운을 떼더니
"어쨌든 내 요점은 내가 진정으로 뭘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거야. 그리고 이제는 다시 놓고 싶지 않고, 내 성격상 이제 그러지도 않을 거라 얘길세."
"..그게 나라는 건가?"
"그렇지. 그러니깐 사라한테 가지 말고 나랑 있어줬음 좋겠어."
라고 쑥쓰러운듯 말을 이었다. 아마 그가 한 말은 그가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법이였으리라. 물론 마지막에 들릴 듯 말듯 "부탁일세."라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존을 존중해주는것도 잊지 않았지만. 존은 그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머리가 혼잡했다. 남자에게 고백이라니! 그것도 자신이라고는 수십억의 사람 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은 남자에게 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사랑의 은어를 속삭이는 여인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이 혼잡한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작지만 강렬한 감정같은게 피어올랐다.
잠시 후에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희열. 그는 기뻤다. 저 남자에게 다른 사람과는 다른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합쳐봐서는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의 고백 같지 않은 고백에 난색을 표하고 친구이상의 관계를 원하는 셜록에게서 등을 돌리고 사라에게 가야 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행동 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머리로는 깨달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어이가 없는 듯 작게 킬킬 거릴 뿐이었다.
"뭐하는 거지?"
"그러니깐.. 그게 네가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고백법이라 이건가? 응?"
"고백이 아니...!.. 그래 고백일세. 그게 고백이야. 그거에 뭔 불만이라도 있나?"
웃어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 절대 말이 안 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존은 지금 이 심각한 상황이 너무나도 웃겼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내가 그 제멋대로이고 천재적인 영감을 발휘하던 그 셜록홈즈라고? 징징거리다가 수줍게 나한테 고백을 하고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키만큰 어린애가? 바짓속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마 사라의 전화였을 거다. 하지만 그는 이 멍청한 상황을 즐기느라 그 진동을 무시하기로 했다. 전화를 들고 "왓슨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대신 셜록을 골려주는 것이 현재로써는 더 유쾌한 일일 것이다.
"좀 더 노력해보는게 어때? 나는 살아생전 그렇게 멍청하고 어리숙한 고백 법에 넘어가는 여자를 본적이 없어서."
"뭐?"
셜록의 얼굴이 획하니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자신도 무안한지 두 손을 맞대고 비비적거리거나 두 손을 맞대어 모은 채 입으로 끌어당기는 등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마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했다. 존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셜록을 쳐다보다가 문득 왼쪽이마에 붙여진 반창고를 발견했다. 분명 삼일 전에 자신이 던진 두꺼운 책모서리로 인하여 생긴 상처를 가린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지금의 자신과 셜록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참으로 묘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저때까지만 해도 지금 자신 앞에 쑥쓰럽다는듯이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남자를 평생가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라고 분노로 다짐을 했었는데 지금은 귀엽다고 느껴진다니. 그러다 문득 존은 셜록이 자신을 다시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뭐 그럴듯한 고백법이라도 생각난 건가?"
"…….키스해도 되나?"
"뭐?"
어이없는 녀석일세. 존은 '웃기지도 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눈앞에 있는 셜록이란 남자는 전에도 말했듯이 한번 생각을 하고 판단을 내리면 누구보다도 행동하는 게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맞은편 소파에서 일어나 존을 향해 다가왔다. 셜록과 존의 거리가 1피트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셜록과 존 가운데에는 이상한 공기가 감돌았다. 무거운 분위기라기보다는 끈적끈적하고 축축하지만 달달한 분위기였다. 글쎄..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존의 설명을 빌리자면 그런 상황에서 키스를 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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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다시 나란히 하룻밤을 보낸 뒤에 존은 어제와 같은 기분이 느껴지지 않은 것에 허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의 그 달달했던 기분은 어디로 갔을까. 오히려 집을 나선 지금 자신의 기분은 비 내리는 런던의 하늘같은 느낌이 들었다. 축축하고 음습했다. 셜록이 보이지 않자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걱정이 엄습했다. 사라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앞으로 정말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아예 전화의 전원을 종료해버렸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가 그들의 집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마 자신이 섣불리 동거를 하자고 말을 꺼낸 것 때문에 존이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것이라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괜스레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르고, 여하튼 존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현재 자신의 입장을 알려줘야 한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사건의 배후를 알게되었을때의 사라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나 목소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비단 사라뿐만이 아니었다. 허드슨부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셜록과 자신의 지금관계를 알게 된다면 자신들을 어떻게 대할까. 분명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지는 않을 것이다('허드슨부인은…….잘 모르겠다.'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존은 공원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공원 한가운데에는 장우산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셜록이 서있었다.
"셜록?"
"별로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이런 날씨에 나간다는 것은 자네가 으레 생각할게 있을 때 마다 밖을 멍청하게 돌아다니는 습관이 도진 거겠지. 게다가 그럴 때마다 자네는 으레 이곳으로 오더라고."
"완벽하네. 근데 내가 항상 여길 온단 건 어떻게 알고있는거야? 미행이라도 했나보지?"
"뭐 비슷하지. 몇 주 전 이 부근에 일어났던 사건을 수사했을 때 자료를 수집할 명목으로 자네 위에 있는 CCTV의 영상을 본적이 있었는데 삼일에 한 번꼴로 자네가 이 공원벤치에 앉아있더군."
존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셜록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구먼.
"그러면.. 내가 생각할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여기를 찾아오는데, 자네는 왜 여기에 와있는거지?"
"그건.."
셜록이 난감하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렇다할 변명거리를 준비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깐.. 벤치가 젖어있으니 오늘은 공원벤치에서 앉아있을 수 없다는 걸 알려주려고 왔네."
"참 친절한 행동일세."
하지만 셜록의 구차한 변명에 하늘은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진 않았나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빗방울을 뿌리던 하늘이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존은 "비가 그쳤는데?"라고 장난스럽게 운을 떼며 셜록을 바라보았다. 셜록은 작게 "젠장"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비가 그쳤어도 벤치는 여전히 젖어있기때문에 막무가내로 자신과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집안에 혼자 멍하니 남겨있는걸 참을 수 없어하는 눈치였다.
"벤치가 젖어있는 날이면 나는 보통 공원 건너편에 있는 저 카페에 들어가서 간단히 요깃거리를 하고 사색에 잠기고 하는데.."
"하고싶은말이 뭔가? 아직도 혼자서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안 따라 올 거야? 그리고 비가 그쳤으니깐 그 우산은 좀 접어둬 바보 같잖나."
몇 발자국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쀼루퉁하게 서있는 셜록이 보고는 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약간은 장난스럽게 그를 불렀다. 셜록의 얼굴이 조금은 펴지더니 쪼르르 존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제 같은 그런 달콤한 분위기는 살아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존은 한결 머리가 가벼워 짐을 느꼈다.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가게로 들어가니 라디오방송에서는 [오늘 오후는 잉글랜드 전반에 걸쳐 햇볕을 쬘 수 있는 운이 좋은 날이 될 것 같습니다. 낮 최고 기운은 19도로…….]라는 기상일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존은 문을 열고 셜록이 들어올 때까지 그를 기다렸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더니 쑥쓰러운듯이 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존 역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같이 미소를 지으며 셜록을 쳐다보았다.
뭐. 가끔씩은 좋은 일도 있겠지. 썩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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