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작은 요람을 기억한다. 하늘의 낮과 밤이 한데 엉켜 산마루로 내려온 황혼이, 산턱의 가랑이를 벌리던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이 누워있던 작은 요람을 기억한다. 요람은 황금색으로 물든 대리석의 펜스 위쪽으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늦여름의 바람을 반겼다. 바람이 살며시 움직이던 요람과 아이의 코를 간질였다. 아이는 재채기를 한 순간을 기억한다. 바람에 실구름마냥 휘날리던 얇은 비단 커튼 뒤로 보이던 실루엣의 여인이 부르던 콧노래가 멈추던 그 순간을. 날이 저무는구나, 방으로 들어가자꾸나. 한 없이 자애로운 목소리를 아이는 잊은 적도, 잊을 일도 없다. 부드러운 육신이 칭얼거리는 어린 아이를 안고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 멀리서 개구진 소년의 커다란 목소리로 인해 아이는 작게 속삭이는 어미의 그 달콤한 속삭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린 아이들의 시야는 좁고 빛 부심이 심하다. 그래서 아이는 황혼의 하늘도 멀리서 뛰어오는 형제의 금빛머리도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반짝거리는 하나의 빛 무리에 불과했다. 아이의 칭얼거림이 점점 심해졌다. 반짝거리는 금빛머리의 형제는 어머니의 옷깃을 잡다가 작은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형제의 머리를 꼭 잡더니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동쪽하늘이 점차 먹색으로 변해가고 별들이 눈을 빛내던 때였다.
* * *
형제여, 나는 그대의 방종함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네.
로키는 토르의 정수리를 쳐다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동그란 정수리를 중심으로 형제의 사자갈기 마냥 날카롭고 풍성한 머리카락들이 모여들어 가마를 만들었다. 로키는 형제의 그 사소한 형상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가 최초로 기억하는 가장 어렸던 시절부터 그 언제 지금처럼 내 형제를 내려다 본 적이 있었는가? 그 순간, 흉곽 아래 감춰진 로키의 심장 중심에서부터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곧게 세워져 날카롭게 로키의 온 몸의 끝까지 달려들어 쿡쿡 찔러드는 그 것들은 요툰헤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투명하고 날카로운 고드름 같았다. 척추에 스며드는 서늘함도 비슷했다. 그 감정은 그간 오딘의 미명(美名)아래 그간 철저히 숨겨졌던 로키의 탄생의 근본이라 할 수 있었다. 줄기를 얼리고 아스가르드의 가지를 꺾으려던 서리거인들의 본능과 같은 정복욕이 로키의 오체에서 만개한 것이다. 그 순간 로키는 굳게 다짐했다. 세상아래 모든 빛나는 것들을 내 발 밑에 두겠다고. 로키는 형제에게 거짓의 작별을 고했다. 토르는 실망과 비통함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순순히 로키의 작별을 받아들였다. 형제의 축 쳐진 어깨가 좁아지고 머리카락이 반동에 약하게 흔들리며 푸른 눈 아래로 새벽의 이슬이 맺히는 모습을 로키는 놓치지 않았다. 약간의 거짓말과정당한 권리로 나는 이제 저 가녀린 자의 주인이다. 로키의 입가에 휘어진 미소가 길게 걸렸다. 그 순간은 커다란 요람에 잠든 아버지나, 토르와 로키 모두를 부인한 채 근처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권력도 로키를 괴롭히지 못했다. 밤이 점차 짙어지고 비바람은 거셌다. 하늘에는 작은 별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Hey, brother
(For.딤쿠)
written by, Cielo
1.
“저 아이는 왕위에 앉힐 수 없소, 프리가. 내 당연한 업보이고 가슴으로 품은 내 자식임에는 한 치의 부정도 없지만 벌써부터 아이의 행동에 교활함이 자라고 있소.”
프리가는 근심어린 눈으로 로키의 방까지 뻗어있는 어두운 복도를 흘깃 쳐다보았다. 기둥사이로 어스름히 달빛이 새어 들어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프리가는 그 것이 곧 빛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프리가의 정신은 어느새 그간의 기억들을 모두 헤집으며 몇 시간 전의 때로 향하는 중이었다. 해가 저물 무렵, 로키가 절뚝거리며 궁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로키를 본 모든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온 몸이 피투성이인 아이를 황급히 업어들었다. 당시 방 안에서 자수를 놓고 있던 프리가는 이 상황을 시녀의 말을 전해 듣고는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단숨에 로키에게 달려갔다. 로키는 잔뜩 겁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지만 용케도 울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눈에는 다급함과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프리가는 로키의 몸을 살핀 뒤 아이를 작게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둘의 몸이 빛나는 가 싶더니 로키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로키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프리가의 말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외쳤다.
“어머니, 토르가 아직 그 곳에 있어요.”
“어딜 말이니?”
“커다란 구덩이요. 오딘의 이름으로 맹세코, 저는 그런 곳인 줄은 몰랐어요.”
로키가 말을 한 뒤에도 사실 프리가는 그 커다란 구멍이 어딘 줄은 전혀 몰랐다. 오딘은 잠시 궁에 없었고, 아무도 로키가 말하는 구덩이를 알지 못했다. 결국 프리가는 병사 몇 명을 보내 로키의 안내를 받아 구덩이를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구덩이에 남겨졌던 토르도 크게 다치진 않았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두 왕자가 빠졌던 구덩이는 황궁을 벗어난 깊은 협곡에 드리운 그림자 안에 숨겨져 있었고, 이는 바나헤임으로 통하는 일종의 차원을 건너뛰는 통로였다는 것이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오딘은 크게 노하여 그 멀고 위험한 곳까지 가서 어떻게 통로를 찾았는지를 문책했지만 로키도 토르도 입을 굳게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오딘은 둘 중 누군가가 먼저 사실을 고하기 전 까지 둘 모두에게 방 밖으로의 외출을 금하고는 씩씩거리며 방에 돌아온 것이다. 프리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오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이 일이 로키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아직 진실을 모르잖아요.”
“진실은 말이오, 프리가, 토르는 평소 내 물음에 침묵을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이오. 아이가 영특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는 항상 진실했소. 로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온갖 장난과 거짓을 일삼았지. 로키가 통로를 찾은 것이 분명하오.”
프리가는 더 이상 입을 열어 로키를 변호할 수가 없었다. 로키는 내일 잘못을 추궁당하고 벌을 받을 것이다. 프리가는 다시 복도를 쳐다보았다. 복도 저 멀리로 새어 들어온 달빛 자락 일부가 어쩐지 일렁이는 듯 했다. 피곤해서 그래. 프리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사실, 마지막으로 프리가가 본 일렁임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시선을 두었던 그 복도 끝자락은 확실히 육안으로는 텅 빈 복도일 뿐이었지만 벽에 건 횃불은 거세게 일렁였고 작은 발소리가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발소리는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위로 빳빳이 솟아있던 잔디가 급히 눌렸다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세우곤 했다. 발소리는 마구간 문 앞에서야 멈추었다. 횃불이 활활 타오르는 문 앞에는 연철 투구를 쓴 거구의 마구간지기가 의자에 앉아 술병을 껴안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곧이어 이 마구간지기는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넘어진다. 마구간을 뛰쳐나온 새하얀 말이 하얗게 빛나는 잔상만 남긴 채 저 멀리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을 쫓으려 급히 마구간으로 뛰어 들어간 마구간지기는 새파랗게 질려 “오딘이시여...”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주저앉았다. 마구간에 말들 중 오딘의 애마, 슬레이프니르를 따라잡을 수 있는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신성한 말이 잠들어 있어야 할 우리의 문은 활짝 열린 채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마구간지기는 간신히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켜 경종이 있는 곳 까지 걸어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어둡던 궁전이 늘어나는 횃불들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주 멀리서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경종소리를 듣자마자 프리가가 달려간 곳은 로키의 침상이었다. 볼록 튀어나온 이불을 살짝 걷어낸 프리가가 곤히 잠든 로키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도 잠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문을 외우며 손을 흔들자 조각이 나 흩어지는 로키의 잔상에 프리가는 탄식을 내질렀다.
“어머니.”
프리가는 뒤를 돌아보았다. 잠옷을 입은 토르가 불안한 눈빛으로 프리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프리가는 토르의 두 어깨를 붙잡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토르야, 네 형제가 말고삐를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니?”
토르는 눈을 내리깔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프리가가 몇 가지를 더 물어봤지만 토르는 같은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전 아무것도 몰라요.”
오딘의 슬레이프니르를 훔쳐 달아난 게 로키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딘은 무척 화가 난 듯 보였으나 토르를 질책하거나 로키를 찾으려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로키에 대해 더 이상의 나쁜 소문이 돌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프리가는 로키의 잔상을 만들었다. 토르는 동그란 눈으로 그 모든 소란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하면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식이었다. 프리가는 토르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이번에는 토르도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진실은 말이오,내 물음에 침묵을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이오.’ 프리가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토르를 쳐다보며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제 서로를 위해 어미에게 거짓말을 할 정도로 너희가 자랐구나. 그러나 단지 나쁘게만 생각해선 안 되겠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일 테니. 프리가는 그날 밤이 지나 여명이 밝아올 때 토르가 발소리를 죽이고 방을 나가는 모습을 밤새 만들어 둔 로키의 잔상을 통해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토르를 뒤 쫓지도, 오딘을 깨우지도 않았다. 어쩐지 이번에는 토르가 로키를 데리고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2.
태어난 이래로 황궁 밖을 나선 적 없던 토르가 궁 밖을 나서기 시작한 건 치국(治國)을 위한 오딘의 가르침으로 인한 것도, 어머니와의 단란한 소풍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토르의 손을 잡고 바깥의 달콤함을 유혹한 것은 토르보다도 작고 가는 로키의 드센 팔이었다. 어린 두 왕자의 비밀은 이 때 처음 생겨났다. 로키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마법에 대한 재능이 특출 났는데, 둘은 수업이나 중요한 일이 없어 한가한 날에는 로키가 둘의 잔상을 만들어 놓고는 감시의 눈을 피해 폭포줄기 뒤에 가려진 나선형의 돌계단을 타고 궁을 벗어나곤 했다. 두 왕자는 궁의 정원에서 볼 수 없는 푸른 숲의 높고 어둑한 위압감이나, 서민들의 단출한 생활과, 위대한 아스가르드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광장의 노인의 말재간을 아주 좋아했다. 특히나 로키는, 왕궁의 답답하고 단조로운 생활보다 바깥세상을 탐험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무척이나 강했다. 그러한 집착은 단순한 어린아이의 고집과 다를 게 없었다. 단지 다른 또래들 보다 좀 더 영악한 것이 그간 로키가 수 백 번이나 황궁을 벗어났으면서도 토르를 제외한 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였다. 토르는 로키가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는 날에도 굳게 입을 다물고 평소보다 행동을 조심히 했다. 그렇게만 하면 다시 돌아온 로키가 신기하거나 재미있는 소식을 가지고 오거나, 좋은 장소를 찾아 와서는 다른 날에 토르를 데리고 가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밤늦게 돌아온 로키가 평소보다도 흥분한 얼굴로 토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성 뒤에 있는 숲 안쪽 그늘이 드리운 협곡에 굉장히 신기한 구멍이 있어.”
“엄청나?”
“엄청!”
토르는 그날 밤 새로운 구멍에 대한 생각으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르가 그 구멍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아스가르드의 용맹했던 전사들의 혼을 기리기 위한 성대한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도무지 어린 왕자들을 돌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형제는 평소보다도 수월하게 궁을 빠져나가 숲으로 들어섰다. 곧은 형태로 높게 솟아오른 전나무들은 빼곡히 열을 세워 아스가르드의 지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여주는 태양을 가리었고, 그 덕에 숲은 깊숙이 들어 갈수록 고요와 어둠만이 짙어졌다. 로키는 손 위에 빛을 내뿜으며 반짝이는 수정체를 들고 다른 손으로 토르의 손을 잡고 앞장 서 걸었다. 간신히 발 앞의 돌부리를 피할 정도로 어둑한 시야에서 위태하게 걷던 토르의 귓가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소리는 점점 거세지다가 기어코 토르의 코앞에서 보랏빛 물거품을 튀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것은 좁은 폭포였다. 낮에는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밤에는 달빛 별빛을 머금어서 하늘의 오로라를 담아두곤 흐르는 황궁의 거대한 폭포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잊혀 숲속에 갇힌 이 폭포는 날카롭게 성을 내며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로키는 그 괴이한 광경에 넋을 놓은 형제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이제 다 왔어.”
둘은 절벽의 비탈진 경사를 타고 내려가 커다란 동굴의 입구를 찾아내고 작게 환호했다. 토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동굴
에 들어서곤 탄성을 내질렀다. 동굴은 숲길보다 밝았고 동굴 안을 뒤덮은 자수정들이 작은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토르는 자신이 마치 밤하늘 한 가운데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키는 토르의 옆으로 다가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장미 덤불 숲 에서도 비슷한 동굴을 찾았어. 그런데 여기보다 예쁘지는 않더라고.”
“정말 예쁘다.”
토르는 입을 벌리며 동굴을 쳐다보았다. 동굴의 저 너머에서 보라색 빛들이 토르를 끌어당기며 아이를 유혹했다. 토르는 자기도 모르게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로키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형, 괜찮아?”
“난 괜찮아.”
“너무 깊게 들어 가본 적은 없는데, 안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어둠속에서 강렬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자수정들의 빛들은 토르에게 달리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 다가오려무나, 아가. 그 순간 깜빡거리던 빛들이 토르의 온 몸을 잡아당기며 그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빛들은 깜빡이지 않았다. 그들은 토르를 잡아끌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빛의 색은 더욱 다채롭게 변해 푸른빛, 붉은빛을 뿜어내며 토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고 잔상들이 토르의 뒤로 길게 꼬리를 남겼다. 토르! 뒤에서 로키가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너무 늦어 버렸다. 빛 무리들은 거칠게 두 아이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고 간신히 토르의 팔을 잡은 로키도 하염없이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토르는 마지막 힘을 다해 로키를 바깥쪽으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어른들을 불러 와, 로키!”
땅바닥에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와 빛들이 바람처럼 고함지르는 소리가 뒤엉키면서 오색의 빛 무리들이 이제는 하나의 단단한 구체로 뭉쳐 아가리를 벌렸다. 토르는 그대로 빛에게 먹혀 정신을 잃었다.
3.
바다가 잔잔하게 흘렀다. 황궁의 폭포에서 시작된 황금빛 물줄기들은 아스가르드 도시 밑을 지나 흘러 내려와 수십 갈래로 나눠지고 마지막에는 결국 아스가르드를 빙 두르는 바다가 되었다. 바다 끝에는 우주의 은하수로 흘러 들어가는 폭포가 있었다. 남쪽은 바다는 유난히 수심이 잔잔했고, 등선이 낮고 햇볕이 잘 드는 산들이 많았다. 토르가 기억하기로는 남쪽에 있는 세 개의 산 중 장미덤불이 있는 산은 딱 하나였다. 한 나절을 꼬박 걸어 지칠 대로 지친 토르는 잔뜩 우거진 장미덤불을 쳐다보며 제발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기를 바랐다. 토르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장미덤불을 제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커다란 가시에 팔이나 다리를 긁히면 토르는 작은 신음을 흘리거나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안으로 들어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덤불까지 모두 제친 토르는 불안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자로 곧게 뻗어있는 매끈한 절벽에 작은 동굴이 보였다. 토르는 너털너털 동굴로 걸음을 옮기며 힘없이 로키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내 동생아. 동굴 안은 지난번과 다르게 사람의 마음을 뺏는 빛깔의 광물이나 이상한 속삭임도 없이 어두웠고 조용했다. 지극히 평범한 동굴이라는 사실은 힘겹게 걸음을 한 토르의 몸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토르의 머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모래에 긁히는 팔 다리가 몹시 쓰라렸다. 토르의 눈에 눈물이 맺힌 순간이었다. 동굴 안 쪽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토르는 눈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로키?”
토르는 작은 목소리로 로키를 불렀다.
“로키, 너야?”
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토르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토르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손에 쏙 들어오는 돌이 토르의 손가락을 스치자 토르는 그 돌을 꾹 잡으며 아까보다도 더욱 조심한 목소리로 빛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지? 로키? 아니면...”
빛은 더욱 빨리 토르에게 다가왔다. 미묘하게 떨리는 색을 띄고 있었다. 아니, 빛을 잡고 있는 손이 떨고 있었다. 겁에 질린 로키의 얼굴이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르?”
토르는 그제야 안도하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손에 꽉 쥐고 있던 돌이 바닥을 살짝 패는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로키는 잠시 경계를 하는 지 토르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누워있는 형제의 옆에 앉았다.
“여긴 왜 왔어?”
“널 데리러 왔지.”
“아버지가 날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로키는 손에 들고 있는 수정구로 토르의 몸을 스윽 살펴보았다. 붉은 망토는 흙투성이가 되어 잔뜩 헤져있었고 팔 다리엔 생채기가 가득했다. 로키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형을 죽일 뻔했잖아.”
“고의가 아니었잖아.”
“만약... 내가 고의라고 한다면?”
토르는 로키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을 깜빡였다. 숨을 골랐다. 로키는 그 순간동안 토르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윽고 토르는 동굴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내 형제잖아, 난 널 믿어.”
동굴 안쪽에서 약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저 안은 또 어디로 향하는 곳이기에 저리도 조용히 고함치고 있을까? 로키는 바람소리에 관심이 없는 듯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보아라, 아우야 너는 지금도 지친 나를 해하려 하지 않잖아. 토르는 작게 미소 지었다.
“로키, 우리 모두 네가 장난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내 동생이 아닌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어?”
"내가 더 심한 장난을 치면? 그 때는 토르, 형이 날 싫어하게 되면?“
“그럴 리가.”
토르는 일어나 로키의 손을 꾹 잡았다. 흙투성이로 한껏 거칠어진 손이지만 무척이나 따듯했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멀리 사라져 버리면?”
“난 그래도 네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거야. 그리고 언제라도 널 찾으러 갈 거야, 오늘처럼.”
로키가 무릎사이로 슬며시 얼굴을 내밀며 토르를 쳐다보았다. 녹색 안광이 순간 번뜩였다.
“그러면 토르, 약속해줘. 형만은 마지막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그러면 나는-”
토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로키는 그 형제의 환한 얼굴을 영영 기억하기로 다짐했다. 그 얼굴 뒤로 반짝거리는 금색의 빛 역시도.
4.
형제여 그대가 나에게 말했지. 마지막까지 너는 내 편이 되어줄 거라고.
로키의 눈앞에 어둠이 도래했다.
지금까지 어둠은 단 한 번도 다 자란 로키를 괴롭힐 수 없었는데형제의 머리처럼,혹은 아버지의 머리처럼, 아니면 어머니의 머리처럼 황금빛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머리카락을 밟으며 똑같은 색으로 인생을 물들일 때, 로키는 제 검은 머리를 밟으며 그 인생을 검게 칠해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로키는 그 어린 시절을 영영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그의 모든 악행들을 그런 식으로 변호했다. 그 날의 모든 것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는가?그 날의 동굴은 해임달이 둘을 찾을 때 까지 어떠한 빛도 없던 칠흑 그 자체였다. 황궁의 빛깔들은 그 날을 너무도 쉽게 잊도록 로키를 끊임없이 종용하면 로키는 제 스스로 먹을 칠하여 색을 바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형제는 그러지 않았지.토르, 오딘의 아들, 아스가르드의 왕이 될 자, 나의 형제여. 로키는 몸을 웅크리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처음 약속을 잊은 자는 누구였는가? 그 날, 로키는 다짐했다. 내 형제가 끝까지 나를 편들어만 준다면 나는 황금의 왕좌를 넘보지 않으리라고. 그러나 토르는 자라면서 점점 방종해졌고 거만함으로 영혼을 채우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자 소매를 잡아당기는 동생의 손을 점차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를 내버려두고선 다른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날이 더욱 많아졌다. 로키는 점점 그 앞에서 말하는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토르는 더 이상 로키에게 괜찮냐는 말을 물어보지 않았다. 형제여 그대는 정녕 그 날을 잊었나?로키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그 날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장미 덤불에 숨겨졌던 작은 동굴 속에 숨어 어둠속에서 벌벌 떨고 있던 그 날이 재연이라도 되는 것 마냥 로키는 어둠이 두려웠다. 하지만 로키는 오히려 크게 웃었다. 어둠이 더 이상 자신의 웃음을 먹어내지 못할 때 까지 소리를 높여 웃다가 돌연 형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웃음이 고함으로, 고함이 광기로, 광기가 흐느낌으로 탈피할 때 까지 토르를 부르짖음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로키의 부르짖음이 뚝 멈추었다. 한동안 로키는 송장처럼 숨을 멈추고 어둠에 그대로 몸을 웅크린 채 미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키는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것을 시작으로 몸을 작게 경련하듯 움직였다. 경련이 잦아들자 로키는 어둠속에서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고 미소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까의 광조(狂躁)와는 다르게 너무도 침착했다. 그래 좋다 이거야. 로키는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나에겐 형제가 존재한 적이 없었지.”
이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둠 사이로 죽어가는 별들이 팽창하는 모습이 보였다. 별들이 밝게 타오르는 별들의 무덤 사이로 로키는 정확하게 아스가르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스가르드의 정당한 왕이야.”
로키의 눈에 광채가 번뜩였다. 그 눈 안에는 모든 빛깔 있는 별들이 서로 엉켜 몸을 태워 공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엉킨 별들의 무리들은 아가리를 크게 벌려 기어코 토르를 집어 삼켜버렸다. 이것은 명백한 고의였다.